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확신의 신앙’과 ‘회의하는 신앙’ 본문

끄적끄적, 쓱쓱

‘확신의 신앙’과 ‘회의하는 신앙’

에쎌디 2019. 8. 3. 19:21

한국 개신교가 엉망진창이 된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난 그중의 하나가 ‘신앙의 확신’을 강요하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강한 확신’의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강한 확신의 문화에 길들여지다보면 합리적인 질문을 할수도 없고, 자기 신앙뿐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에 대해 과연 옳은 방향으로 가고있는지 의심하고 성찰하는 문화가 생길 수가 없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질문과 의심’이 불가능한 일방적인 소통과 세뇌에 가까운 주입식 신앙교육만이 난무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우리교회 장년부에서 집사님들이 성경공부를 할때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 세대주의가 뭔가요?’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목사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런거 몰라도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모르면 모른다고 이야길 하던가…’그런 질문’은 하등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오만한 태도도 문제지만 자신의 무지를 그런식으로 합리화하며 질문자를 무안하게 하는 권위주의와 폭력성또한 지금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나친 확신의 문화는 공동체 구성원간의 정직한 소통과 질문을 차단하며 그런 확신의 문화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폄하하고 폭력적으로 학대하는 문화를 낳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그렇게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으로 ‘신의 뜻’을 확신하고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하나님이 단순하고 기계적인 분인가?

재밌는 것은 ‘믿슙니까?’를 외치며 ‘오중복음 삼중축복’의 전도자가 되었던 조oo원로 목사를 비롯해서 많은 타락한 개신교 목회자들이 ‘확신의 전도자’였다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잘알고 성도들에게 강한 확신과 신앙이 중요하다고 외쳤던 양반들이 왜 시간이 지나면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범죄외 부도덕을 저지르는지 우린 정직하게 반성하고 성찰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확신의 신앙’의 유효기간이 끝난것이 아니라, ‘확신의 신앙’자체가 ‘신을 향한 믿음’에 있어 잘못 끼워진 ‘첫단추’가 아닐까?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 겸손하게 알아가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확신하는 태도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도리어 그런 구도자의 태도를 가질 사람일수록 끝없는 ‘회의와 질문’하는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신의 존재나 그 뜻은 우리 인간의 지혜와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신비와 불가해한 영역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 신은 우리 인간의 얄팍한 지성과 인격 보다 못한 존재가 아닐까?

누구나 다 하나님의 뜻이 이럴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한걸음 멀리서 바라보면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입장,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의 이익에 부합하는 ‘하나님의 뜻’인 경우가 많다. 인간의 이해관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인간의 심리는 간사해서 그런 이해관계에 교묘하게 ‘신의 뜻’을 덧입혀 포장하는데 능하다. 그렇기에 신의 뜻을 잘 분별하려는 사람일수록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자기의 욕망을 정직하게 바라보며 반성할 줄 아는 ‘성찰의 용기와 날카로운 지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덕목은 ‘자기 확신’이 강한 공동체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성품이기도 하다.

강한 확신의 공동체는 자기 반성이 아니라 자기 최면의 문화를 낳을 수 밖에 없고, 아무 생각없이 맹종하는 문화 속에 교인들은 더욱 더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신앙에 길들여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에대해 정말 잘 알고 싶고 그분의 뜻을 잘 알고 싶고 닮아가고 싶다면 강한 확신의 최면에서 빠져나와, 이것이 과연 그분의 뜻이 맞는지 질문하고 성찰할 줄 아는 신앙으로 돌이켜야 한다.

이 길이 맞는 길인지 주저하고 반성하며 돌아볼 줄 아는 신앙...즉 ‘회의하는 신앙’은 약해빠진 신앙이 아니다. 회의하고 질문할 줄 아는 신앙이야 말로 나 자신에게 정직한 신앙이며 하나님은 그렇게 정직하고 겸손하게 그분을 찾는 자들을 진심으로 기뻐하실 거라 생각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온전히 다 알 수 없다. 그리고 당신이 모르는 것을 영빨 좋은 목사가 대신해서 알려줄 수도 없다. 더디고 힘들고 안개속을 걷는 것 같아도 결국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 21세기 천로역정의 길이 아닐까?

지금 돌아보면 내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확실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여겨졌던 선택의 경우에도 결국 시간이 지났을 때 실망과 좌절만 가득했던 경험이 많다. 진짜 하나님의 음성이었는데 내가 잘못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몇번의 그런 경험후에 나는 ‘확신어린’ 하나님의 음성을 도리어 경계한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하는데는 그런 유보적인 태도와 함께 내게 주신 상식과 성경이해와 독서를 비롯해 깊은 사색과 성찰이 도움이 많이 된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은 나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앙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과 함께 함께 ‘생각할 줄 아는 뇌’를 주셨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감수성과 더불어 이성의 힘을 이용해서 희미하게나마 그분의 뜻을 계속해서 찾아가는 여정을 걸어간다는 것...이미 모든 정답을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의 태도보다 훨씬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여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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