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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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쓱쓱

[기도의 폐해]

에쎌디 2019. 9. 21. 11:53

‘기도의 폐해’라니 이 무슨 반기독교적인 개념인가? 내가 생각해도 수위가 좀 쎈 표현이다 . ㅋㅋ 그러나 나는 한국교회가 그토록 목숨거는 온갖 새벽기도와 기도회가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다. 기도의 열정과 기도에 쏟아붓는 물리적인 시간과 노력을 세계적으로 비교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세계 1,2위 안에는 들 나라가 한국이 아니던가? 어느동네, 어느지역에 가도 계절마다, 분기마다 특별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 교회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이상하리만치 윤리적 부패와 세습, 목사들의 성범죄, 반지성주의, 반사회적 경향이 강하다. 사랑과 관용에는 더디고 둔감하며 혐오와 차별에는 민감하게 앞장선다. 원래 예수나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가 그런것이라면 할말이 없으나...성경이나 예수의 삶을 보면 또 그런것 같지도 않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기도의 열매는 기형적인...그런 모습이 한국교회의 적나라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범죄하고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목사들은 하나같이 ‘회개’할 줄 모르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내가 뭘 잘못했냐는 식의 뻔뻔한 모습을 보인다. 나는 항상 의문이...’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고, 기도에 열정을 갖고있는데 왜 한국의 개신교는 이모양일까?’하는 의문이었다.

나도 한때는 새벽기도도 열심히 다니고 주중에도 퇴근하고 가끔 교회를 들러서 1시간정도 기도하고 집에 갔던 나름 경건한 교인이었다.(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별로 기도를 하지 않는다. 기도하기 보다 그저 하루 하루 일상을 하나님앞에서 충실하게 살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삶의 노력을 내 나름의 기도로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교회가 그토록 강조하는 기도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느낌...싫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기도 자체가 싫다기보다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하는 개신교인들에 대한 거부감과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기도 자체를 멀리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것도 뭐 날라리 신자의 비겁한 변명일수도 있지만 ㅎ

여하튼 나는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무섭고 싫었다. 체험적으로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뒷통수를 맞고 배신감을 느낀 적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강한 에고와 고집, 대화가 안통하는 불통의 분위기가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소위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사람일수록 대화가 통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할때 당신의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그런 이들은 꼭 이런 표현을 쓴다. ‘제가 기도를 해보니까…’ 그 이후에는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자기 느낌, 자기 생각’은 기도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려주신 ‘싸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나에게만 특별한 그 무엇’을 기도를 통해서 알려주셨다는 확신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기도를 많이 하면 한다고 자부한다는 사람일수록 이런 패턴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런 이들을 볼때마다 나는 차라리 저 사람이 ‘기도’를 좀 쉬고 안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매력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재미있게 보는 책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을 극적인 성공에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왜곡된 자의식(에고)에 대해 다룬 ‘에고라는 적’(라이언 홀리데이)이다. 그 책에서 기도는 많이 하는데 열매는 이상한 한국교회와 교인들, 목사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았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어떤 성과를 거두었다고 치자.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그에 걸맞은 명예를 선사한다. 그 뒤에 에고는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길 바란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 남보다 나은 사람이지. 일반적인 원칙은 나한테 적용되지 않아.’’

(에고라는 적 | 라이언 홀리데이)

이 문장을 읽고 평소부터 가졌던 의문…’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며 소통이 힘들고 비윤리적인 개신교인들이 되는’ 아이러니와 미스테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기도는 그들의 비뚤어진 에고를 강화시키는 기폭제였던 것이다. 그들의 비뚤어진 에고와 욕망을 부풀리는 수단이 ‘기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평소에도 자신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으로 가득찬 존재이니 그런 에고 뽐뿌가 얼마나 쉽겠는가?

사실 많은 교회의 특별새벽기도회에 초대하는 마케팅 문구를 보라. 인생의 모든 문제나 결핍이 ’특새’를 거쳐 해결될거라는 식으로 교인들을 유혹하지 않는가? 우리 교회만 해도 전00목사가 있을때 얼마나 많은 청년들의 외로움이 특새로 해결될 것 같이 유혹했는지...나도 그런 미끼(?)로 팀원들을 특새에 동원하려고 했던 간사로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러운 흑역사다. 그래서 수많은 청년들이 특새 때 전00목사에게 안수한번 받겠다고 집에도 안들어가며 예배당에서 밤을 샜다. 그리고 특새 후에 정말 솔로 탈출한 청년들은 이게 다 특새기도의 열매(?)라며 자랑스럽게 간증을 하곤했다.

그리고 사회의 지탄을 받는 불법을 행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목사들이 자기들을 합리화하며 시간이 얼마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겠다며 기어나오는 현상도 저 문장은 완벽하게 설명한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 남보다 나은 사람이지. 게다가 하나님도 날 선택했어. 일반적인 원칙은(일반적인 법이나 상식은) 나한테 적용되지 않아.’

성범죄를 저지르고 물러났고 (형사소송은 공소시효가 지나서 안되기때문에) 민사소송으로 1억까지 내뱉은 전00목사도 범죄가 드러난지 2년도 안되서 강단에서 이런 말을 설교랍시고 했다. ‘털어서 먼지안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수의 피해자가 있는 성범죄를 먼지로 비유하는 패기...먼지가 아니라 똥인것 같습니다만…) 금 간 그릇이 좋습니까? 금 안 간 그릇이 좋습니까?’(그릇이 아니라 변기인 것 같습니다만...)

이 사람 뿐 아니라 수많은 부패한 목사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강단에서서 지금 이순간도 설교를 하며 목회를 하고 있다. 그들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의 상식과 원칙은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어떻게 그들이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이 그럴 수 있는 원동력이 ‘잘못된 에고를 부풀리는 기도’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해본다.

그리고 그런 목사들 뿐 아니라 수많은 교인들이 그들을 따라 자기의 병든 에고와 욕망을 부추기는데 ‘기도’를 수단으로 삼아 열심히 아침 저녁으로 부르짖고 있다. 이쯤되면 이런 기도는 한국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이 아니라 붕괴의 원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나도 ‘기도’의 긍정적인 순기능과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건강한 기도, 제대로된 기도는 분명히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예수의 인격을 닮아가는 열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열매이지 눈에 보이는 어떤 성취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은 ‘기도의 열매’를 ‘눈에 보이는 성취나 업적’과 동일하게 여기며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기도’는 눈에 보이는 성취나 내게 부족한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기도의 역할에는 일정부분 그런 것들이 있으나 어쩌면 그것은 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다. 나는 기도에 대한 여러 사람의 정의중에 ‘김영봉 목사님’의 ‘사귐의 기도’라는 책의 정의를 가장 좋아한다.

‘기도의 참된 의미는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내가 처음 내린 독특한 정의가 아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동안 기도의 본령에 접근했던 사람들 모두 이렇게 여겼다. 예컨대 존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모두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의 사귐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 모두 드려야 합니다.’

-사귐의 기도-(김영봉 IVP)’

나는 매일 새벽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부르짖는 새벽기도의 외침 중에 얼마나 많은 기도가 자신의 병든 에고를 강화하는데 드려지는 기도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데 드려지는 기도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의 성품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려고 기도하는 이들이 많다면 지금의 한국 교회가 이렇지는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있다.

그리고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라 애초에 하나님의 형상이나 예수의 성품을 닮고 싶다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포기한지 오래다. 그래서 앞으로도 기도를 많이 하진 않을 것 같다. 뭐...기도해도 잘 안들어주셔서 ‘응답받지 못한 기도의 위로’라는 무지막지한 장문의 글을 쓰기도 했지만ㅎㅎ(무응답기도의 전문가..ㅋ)

여하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기도가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다는 것. 그리고 한국의 교회들이 그토록 중요시하는 기도가 망국의 지름길이 되지 않으려면 ‘기도해선 안될’ 교인들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가르치자! 그러면 적어도 ‘기도로 인한 폐해’는 막을 수 있으니까…

‘서울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자신있게 선포했던 분이 지금 감옥에 있는 것처럼 자꾸 자기 욕망을 기도로 포장하고 하나님을 변명삼아 추구하다가 내꼴도 추해지고 하나님 명성에도 흠집이 가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말자는 거다. 자기만 망하면 됐지 왜 자꾸 하나님을 팔아먹는지…

그래서 자랑은 아니지만...난 기도 안 한다.



※ 7월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옮겨 봅니다. 뭐...강한척 기도하지 않는다고 썼지만 전혀 기도를 안하지는 않아요...ㅎ 물론 저도 가끔 기도합니다. 독실한 신앙인들이 볼때는 거의 기도를 안하는 것 같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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