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하는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 본문

기고글-ㅍㅍㅅㅅ, 뉴스앤조이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하는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

에쎌디 2017. 12. 27. 09:13

※ 2017년 4월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만나는 크리스천이나 교회에서의 크리스천들도 교회봉사활동에 열심인 부분만 제외하고는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비신앙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믿는다는 점만 차이일뿐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바도 '커지고, 강해지고, 성공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죠. 얼마 전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삶은 결국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하더라도'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아닐까요?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하는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



-어쩌다 이 길에 들어섰을까? 첫 신앙의 추억-

난 어쩌다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어쩌다 신앙의 매력에 빠졌을까? 그리고 난 왜 지금의 교회와 개신교인들의 신앙에 회의하고 절망하는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교회를 안나가는 가나안 교인 이야기가 한참 들려올 때,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깊이 공감하며  그들의 심정에 100% 공감이 갈정도로 교회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깊다. 그래도 여전히 교회는 다니고 있다. 그동안 쌓아온 인간관계가 다 교회에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직은 내가 교회를 위해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기도 하고, 그저 내 희미한 신앙의 마지막 동아줄인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글쎄 무엇때문에 난 여전히 교회를 욕하며 교회를 다니는 걸까?




지금 지나온 길이 후회가 되고 내가 가는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인지 알고 싶을 때,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처음 내가 신앙을 갖게 된 계기는 이성적인 설득이었다. 친구가 우연히 건네준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으면서 그의 주장과 그의 논리에 완전히 설득당하는 경험을 한 이후 나 스스로 교회를 다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주변에 아는 신학대를 다니는 친구에게 연락해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나 좀 교회에 데리고 가 달라고 한게 그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신앙생활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름 신과의 첫사랑이라 할 수 있는 뜨거움은 있었기에 친한 친구들을 다 전도해서 같이 교회를 다녀오곤 했지만, 성경도 잘 모르고, 교회 문화도 잘 모르기에 이질적인 문화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내가 다니던 교회가 내가 생각하는 교회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교회를 개척하고 설립한 원로 목사가 예배 마지막 시간에 축도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짐짓 낮고 장엄하게 내리깔린 소위 홀리보이스로 자신있게 선포하였다.

‘하나님, 우리00교회 성도들 모두가 축복받아 번창하여 ‘소나타3’이상을 몰고다니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아멘!!’


난 그 축도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눈을 뜰만큼 충격을 받았는데,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교인들의 우렁찬 ‘아멘!’ 소리였다. 나와 같이 온 친구들도 다 충격을 받았는지 서로를 돌아보며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들은 그 원로 목사의 기도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왔다. 다 교회 다닌적도 없고, 신앙생활 해본적도 없는 친구들이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여기 다니지 말자! 점 집에 온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그렇고 신앙의 초짜도 되지 않았지만 가짜가 무엇인지, 무엇이 기독교적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는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나보다. 난 나름 이 신앙이 내 삶을 이끌어줄 진리이자 인생의 등대가 될 수도 있는 ‘고상한 그 무엇’이라 생각하며 결단하고 온 건데 고작 ‘소나타3’를 위해 축복기도하는 목사를 보고있자니 역겨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선교단체, 믿음에 헌신된 사람들과의 만남-

그렇게 첫 교회생활이 실패하고 잠시 신앙적인 방황을 하며 소강상태에 빠졌을때 우연히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을 통해 선교단체를 소개받았다. 주로 일대일 성경공부로 전도하던 단체였는데 처음 경험을 통해 성경에 대한 무지가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의심없이 성경공부에 응하게 되었다. 별 기대감 없이 시작한 성경공부는 의외로 상당히 재밌었고, 성경공부도 공부지만 성경의 진리와 말씀대로 진지하게 살아가려는 선교단체 선배들의 경건한 삶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엇인가에 온전히 헌신되고, 분명한 목적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력적으로 보였으니까.


그 선교단체에 꾸준히 다니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강도높은 제자훈련을 받는 신앙생활에 접어들게 되었고, 그 이후에 결국 그 곳을 나와 교회로 다니게 되었지만 내 신앙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 같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나를 매료시켰던 건 교리적인 진리,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알아감, 친밀한 성도들의 교제, 경건한 헌신이 주는 기쁨 등 여러 요소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신앙적 상상력’이었던 것 같다. 처음의 선교단체는 매우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신앙관을 갖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바, 꿈꾸는 비전에 대해서는 충실하고 치열하게 살아갔다. 그곳에선 해외의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가장 영광스런 소명이었으며, 캠퍼스 복음화의 비전아래 대학생들을 향해 불타는 소명감이 있었고, 실제 삶도 그런 꿈에 최적화되어 단순화시켰다. 돌이켜 보면 난 사상의 화려함이나 정교함, 교리적 정합성에 매료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던 것은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치열하게 헌신된, 단순한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삶이 일반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진부한 상상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을 향한 꿈이라면 더욱 강렬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하나님 나라,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시간이 지났고, 환상은 깨졌으며, 현실은 처참한 막장인 한국 개신교의 여러 모습을 체험하고 나서 난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난 왜 이 길을 걷기 시작한 걸까? 난 교회를 왜 다니기 시작한 걸까? 결국 돌아보니 나를 매료시켰던 것은 교회야 말로 다른 세상을 꿈꾸는 거의 유일한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교회말고도 다른 세상을 꿈꾸는 대안적 공동체가 여럿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내게 교회의 가장 큰 매력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는 공동체’다. 그 다른 세상은 ‘하나님 나라’라고 불리우기도 하고, ‘천국’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그리고 ‘다르다’는 의미는 신앙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룩하다’의 본래 뜻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주일학교나 성경공부 시간에 '거룩'의 의미를 설명할 때 흔히 '구별되다', '남과 다른 삶을 살다'라는 뜻으로 가르치곤 한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개신교인들의 삶이나 교회의 행태를 돌아보면 과연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남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고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세상은 목적을 위해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한다.

-교회 또한 목적을 위해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한다.


-세상은 돈을 잘벌고 거대해지는 것을 성공이라 정의한다.

-교회 또한 헌금액수가 많아지고 교회건물이 커지는 것을 부흥이라고 정의한다.


-세상은 기업가, 국회의원, 유명인들을 우대하며 부러워한다.

-교회또한 기업가, 국회의원, 유명인들을 우대하며 신앙의 롤모델로 추앙한다.


-세상은 힘과 권력과 부를 끊임없이 탐닉한다.

-교회 또한 힘과 권력과 부를 끊임없이 탐닉한다.


-세상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

-교회 또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


-세상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아픔과 희생을 당연히 여긴다.

-교회 또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아픔과 희생을 당연히 여긴다.


대략 열거해 본 이런 현상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만큼 세상과 교회는 그 추구하는 가치에 있어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만일 교회가 그들이 주장하는 '거룩'의 의미처럼 세상과 다른 가치를 추구했다면 위에 열거한 가치들은 아래처럼 바뀌어야 했을 것이다.


-세상은 목적을 위해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좋아한다.

-교회는 생명이 목적이다. 생명을 위해 느리고 비효율적인 것을 기꺼이 감수한다.


-세상은 돈을 잘벌고 거대해지는 것을 성공이라 정의한다.

-교회는 소수의 사람이라도 예수닮은  사람들을 양육하는 것을 부흥이라 정의한다.


-세상은 기업가, 국회의원, 유명인들을 우대하며 부러워한다.

-교회는 유명하지 않고, 가난하고 힘이없어도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우대하며 부러워한다.


-세상은 힘과 권력과 부를 끊임없이 탐닉한다.

-교회는 힘과 권력과 부가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 그 유혹을 경계하고 힘없고, 권력없고, 돈없는 곳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집중한다.


-세상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

-교회는 약자와 고난받는 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공동체 내에 가장 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인다.


-세상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아픔과 희생을 당연히 여긴다.

-교회는 아흔아홉마리 양떼를 남겨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떼를 찾아나선 예수의 말씀을 따라 다수의 뜻으로 소수의 뜻을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우선한다.

이 외에도 수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지금의 교회는 정말 세상의 가르침과 가치관과 전혀 다른 예수의 목소리를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교회내에서 종교적인 헌신과 말씀의 선포는 넘치지만 왜 세상사람들은 교회와 교인들을 보며 '거룩함'을 느끼거나 ‘남과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느끼기 힘든걸까?





난 현대 교회가 약화된 여러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다른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상상력의 기반은 성경이다. 성경에 보면 당대의 문화와 주류적 가치관과 전혀다른 기준을 가지고 도전하고 부딪혔던 신앙인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물론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예수일 것이다. 예수는 당대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상식을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역설과 도전이 그의 가르침과 행동에 가득했다.


예수는 당대의 종교와 정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종교지도자들의 탐욕을 꿰뚫어 봤으며,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부나 권력이 아니라 생명임을 설파했고, 힘과 권력이 아니라 희생과 죽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


예수의 삶만 그런 것일까?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함으로 따랐던 많은 선지자들과 신앙인들 중에 현대의 기준으로도 여전히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모세의 이야기에서 통쾌함을 느끼고, 다니엘의 이야기를 사모하며,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전율을 느낀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다른 신앙인들의 삶은 결국 어떠했는지 진지하게 살펴본다면 그리 신나는 이야기들이 많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대부분 고난받고 고생하다가 별다른 승리의 열매 없이 죽어가며 초라한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성경을 읽어나간다면 현대의 기준으로 인생역전에 성공해서 하나님 믿고 부자되고, 승진하고, 명예를 얻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다만 몇 사람의 이야기가 교회에서 계속 반복되어 이야기되기에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이다. 도리어 하나님 바르게 믿다가 맞아 죽고,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바른 소리 하다 죽고, 하나님 잘 믿는다고 시험당해 온 가족이 사망하거나, 쫄딱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훨씬 많다.

구스타프도레-아모스.jpg

※고생 참 많이 한 선지자 아모스, 이런 선지자들의 삶은 주일 설교 주제로도,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신앙명으로도 별로 인기가 없다. 요셉, 다니엘은 인기가 많지만 - 구스타프 도레 판화-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하는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

그럼 이제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나는 왜 믿는가?

나는 왜 이 길을 걸어가는가?

성공하고 행복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성경을 면밀히 읽어보고 내 앞을 따랐던 신앙인들의 발자취를 돌아본다면 그건 이유가 될 수 없다. 하나님 믿는다고 잘먹고 잘살고 행복하게 되는 것은 신앙과 그다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어보이니까.


그렇다면 난 왜 굳이 이 길을 걸어가는 걸까?


난 성공의 자리보다 실패의 자리가 익숙하고, 강자의 자리보다 약자의 자리가 익숙하다. 그리고 거인들의 삶의 발자취보다 소시민의 소박한 삶이 더 자연스럽다. 어쩌면 난 약해지고, 작아지고, 실패한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길을 걷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크고, 강하고, 성공한 자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관심과 사랑을 쏟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여전히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의 자리에 있는 연약한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 또한 여전히 이 자리에 있는게 아닐까?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내내 그런 삶의 발자취를 보여주셨다. 그는 화려하고 성공한 자들이 아니라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작고 약하고 실패한 인생의 그늘에 앉아있는 자들을 찾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희망과 구원이 되어주셨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종교개혁의 주체였던 개신교가 어느새 가장 개혁되어야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 역설적인 현실에서 한국교회와 신앙인들이 회복해야할 신앙의 미덕은 어쩌면 아주 간단한 것일지 모른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성서의 상상력을 회복하고 다르게 살아 보는 것이다.


세상은 빨라야 된다고 하지만

느리게 사는 삶을 살아본다.


세상은 커지라고 하지만

작아지는 삶을 선택해 본다.


세상은 강해지라고 하지만

약해지는 삶을 살아본다.


세상은 지는 싸움은 하지 말라고 하지만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싸움을 싸워본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극심한 신앙적 회의와 절망에 빠졌을 때 그래도 이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되어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꺼이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하는 자리로  갔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통해 난 예수의 사랑과 애통함, 긍휼을 느꼈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무엇보다 이 불의하고 악한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가 온전히 회복된 다른 세상,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꿈꿀 수 있었다.



미수습자 가족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세월호를 기억하는 기독인들 기도회



작고 약하고 항상 실패하는 이 보잘 것없는 인생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실지 솔직히알지 못한다. 합리적 대책이 없어 보이는 그들을 보며 답답할 때도 많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수없이 많은 역설의 신비를 드러내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기대해 본다.


그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이라도

한 족속의 조상이 될 것이며,

가장 약한 이가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다.

“때가 되면,

나 주가 이 일을

지체없이 이루겠다.”

[이사야서 60:22] 새번역


작아지고, 약해지고, 실패하는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 난 그분을 믿는다.

어떤 이에게는 실패와 작아짐이 익숙하지 않겠지만 내게는 작고, 약하고, 실패한 인생 길이 너무 익숙하다. 이제 난 그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 초라한 길에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도 그 길은 꽤나 매력적인 길일테니까. 난 오늘도 내 비루한 삶에 동행하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작고 초라한 인생가운데 임하실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를 기대한다.

<2017년 4월14일 뉴스앤조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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