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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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의 구원

사소한 것들의 구원

에쎌디 2017. 10. 10. 20:00

여기는 제 삶의 기쁨을 주는 소소한 일상과 재미난 정보, 위로와 감동이 되는 순간들을 기록하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의 제목을 따온 '사소한 것들의 구원'이라는 글을 옮겨 봅니다. 마음이 유독 우울하고 가라앉을 때 썼던 글인데 가끔 다시 읽어봐도 위로가 되네요~^^ 결국 거대한 욕망이 우리를 이리 저리 몰고가는 시대에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소해 보이는 일상의 축복'이 아닐까요? 사소한 것들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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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크고 강하고 화려한 것들을 선호한다. 그리고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었던 크고 강하고 화려한 것들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노력한다면 누구나 쟁취할 수 있다고 온갖 미디어와 책들에서 유혹하고 있다.


그런 거대하고 화려한 것들을 욕망하는 것을 교회마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며 합리화하고 독려하고 있다.


당신은 그런 화려하고 거대한 것들을 누리기에 합당할 만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며 '잘되는 나'를 꿈꿀 자격이 있다고 독려한다. 거대한 욕망과 꿈들의 집합체가 되어버린 교회는 어느덧 작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멸시하고 있다.

게다가 온통 크고 거대하고 화려한 것들만을 쫓으며 기도하고 예배하던 기독교인들은 이웃들의 참담한 비극과 아픔조차 같이 울지 못하고 오직 황금으로 목숨값만 계산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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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 권사가 보낸 카톡]



그러나 나는 그런 욕망을 추구하며 살만큼 잘나지 못했고, 의지와 체력은 턱없이 약했으며, 결핍투성이 삶이었다. 크고 강하고 아름다운 것들과는 상관없는 내게 세상은 매정하고 황량했다. 나는 경쟁에서의 우위와 꿈을 향한 성취로 판단하는 세상에서  전형적인 낙오자였고 실패자였다.


이런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기 위해 성경과 신학책, 기독교 서적들을 뒤적거렸다. 많은 위로가 되기도 했고, 몰랐던 것들을 깨닫는 기쁨도 컸다. 그러나 이론은 결국 실존의 결핍을 채워주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괴롭고 고단했다. 나는 보기보다 예민해서 삶의 고단함에 마음이 가라앉을 때가 많았다.


난 신앙인이지만 내 삶이 벼랑 끝에 섰을 때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진리...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존재 목적과 의미'가 날 구원해 준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내 마음의 변화를 섬세히 헤아리는 벗들의 안부, 따뜻한 말 한마디, 환한 미소, 분에 넘치는 격려, 페북의 좋아요 하나, 찬란한 햇살, 곱디 고운 이름 모를 야생화,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구름이의 배, 쵸코의 눈망울, 비오듯 쏟아지는 벚꽃잎, 뜻밖의 기프티콘, 천진난폭한 내 친구의 화통한 전화 한통...


이런 사소한 것들이 날 구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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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당신을 영원토록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는 거창한 교리는 거대하고 화려한 종교적 상징물이 아니라 내 주변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소한 사랑과 관심'으로 나에게 임했다.


너무 바빠서 그런 사소한 사랑과 관심조차 보여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그렇게 바쁜 사람들도 그런 사소한 사랑과 관심으로 자기 삶이 유지된다는 걸 모를 뿐…


삶은 거대한 교리나 명분과 사랑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너무 작고 보잘것 없어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사물들과 작은 사랑으로 팍팍한 우리네 삶은 무너지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하나님의 영광’은 ‘크고 화려한 것들’보다 ‘하늘을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마6:26~34)처럼 우리 주변의 작은 것들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구원한다. <2015.04.23-웹진 광장.청춘 기고> ※글 읽고 남겨주시는 공감버튼 하나, 댓글 하나에 뽀로로는 넘 기뻐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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