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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기도의 폐해’라니 이 무슨 반기독교적인 개념인가? 내가 생각해도 수위가 좀 쎈 표현이다 . ㅋㅋ 그러나 나는 한국교회가 그토록 목숨거는 온갖 새벽기도와 기도회가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다. 기도의 열정과 기도에 쏟아붓는 물리적인 시간과 노력을 세계적으로 비교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세계 1,2위 안에는 들 나라가 한국이 아니던가? 어느동네, 어느지역에 가도 계절마다, 분기마다 특별새벽기도회를 하지 않는 교회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이상하리만치 윤리적 부패와 세습, 목사들의 성범죄, 반지성주의, 반사회적 경향이 강하다. 사랑과 관용에는 더디고 둔감하며 혐오와 차별에는 민감하게 앞장선다. 원래 예수나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가 그런것이라면 할말이 없으나...성경이나 예수의 삶을 보면 또 그런것..
한국 개신교가 엉망진창이 된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난 그중의 하나가 ‘신앙의 확신’을 강요하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강한 확신’의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강한 확신의 문화에 길들여지다보면 합리적인 질문을 할수도 없고, 자기 신앙뿐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에 대해 과연 옳은 방향으로 가고있는지 의심하고 성찰하는 문화가 생길 수가 없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질문과 의심’이 불가능한 일방적인 소통과 세뇌에 가까운 주입식 신앙교육만이 난무하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우리교회 장년부에서 집사님들이 성경공부를 할때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 세대주의가 뭔가요?’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목사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런거 몰라도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
1월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옮겨 봅니다.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쓰는데 건강관련해서 아래 글은 블로그에 꼭 옮겨놓고 싶었거든요^^새해 계획 중 건강과 관련된 소소한 실천계획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 밥 천천히 먹기(15분이상), 둘째 12시간 공복 유지하기, 셋째 하루 20분 정도는 꼭 운동하기... 그중 하루 20분 운동하기는 작년부터 일주일에 3-4일은 지켜온 것 같네요.사람마다 성향은 다르겠지만 ‘제대로’ 운동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마음으로 피트니스 클럽에 등록해서 다니는 것보다 집이나 직장에서 짬날때 조금씩 운동하는 전략이 내게는 꽤나 잘맞았고 실천하기도 좋았습니다. 그냥 생각날 때 직장에서 스쿼트를 하거나, 퇴근해서 좀 피곤해도 ‘로잉머신’을 20분씩 타는 운동을 통해 운동효과를 꽤 보았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변화가 커다란 도약과 극적인 반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인생을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변화는 처음부터 강한 충격이 아니라 어쩌면 ‘작은 균열’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까지 견고하게 믿어왔고 의심없이 걸어왔던 그 길이 과연 맞는 길인가라는 작은 의심...그리고 그런 생각에 작은 균열을 내는 사소해 보이는 자극이 어쩌면 내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북경의 나비 한마리 날개짓이 바다 건너 태풍을 만들어낸다는 ‘나비효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작은 변화가 연속해서 발생하고 쌓여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나비효과의 개념은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내가 변하지 못하거나 변하지 않는 건 ‘작은 균열’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작은 균열은..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 성공가능성이 높다.’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공하는 사람들에대한 고정관념에 위배되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뚜렷한 확신과 비전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서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큰 성공을 거둔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도리어 그게 아니라 위험을 회피하는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여러가지 다양한 사례와 통계를 이용해 주장하는 책이 있다. 애덤 그랜트의 ‘오리지널스’라는 책이다. 애덤 그랜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당신이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이고 당신의 사업 구상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면, 당신이 추진하는 사업은 끝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하게 덤비는 도박꾼 기질이라면, 당신의 창업은 사상누각일 가능성이 ..
어제 BBC채널에서 '윤리적 육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윤리적 육식이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로 하고,동물에게 쾌적한 사육환경을 제공하며, 지속가능한 육식을 의미하는 건데~ 다큐를 보니까 인류의 육식량이 늘어나서 미치는 환경의 영향이 정말 심각했다.미국은 정통적으로 육식을 많이 먹어서 연간 1인당 고기 소비량이 100kg이 넘고 유럽도 정통적으로 육식을 많이 소비하니 연간 50kg정도 된다. 그런데 여기에 중국이 가세했는데 자본주의를 본격 도입하기 전 중국은 연간 소비량이 5kg정도였는데 지금은 40kg을 육박하고 있는데 인구가 워낙 많으니 그 영향이 장난아니었다. 그리고 통상 한 나라가 개발도상국단계를 넘어가기 시작한 시점부터 육식의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하는데...문제는 육식소비량이 증..
어떤 목사님의 글에서 어느 집회에 참석했는데 '영성이 느껴지지 않았다'라는 표현을 봤다. 그분의 글 자체에 공감을 못하거나 그분을 저격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그냥 그런 표현과 워딩이 너무 낯익지만 평소부터 거부감이 있어서 관련된 생각을 적어본다.교회에서는 매우 친숙한 표현이고 습관적으로 쓰지만 교회밖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언어들을 '종교방언'이라 칭한다면, 나는 한국교회의 종교방언이 건강하지 않은 신앙을 부추기는 면이 있다고 본다.대개 그런 종교방언등은 곤란한 상황을 퉁치거나(기도할께), 책임을 모면하거나 (기도해 볼께요), 정확한 평가를 하면 상처받을께 두려워서 (은혜로왔어요) 두리 뭉실하게 넘어가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그런데 그런 정도의 종교방언등은 그나마 귀여운 수준인데~문제는 측정할 수 없고 객관..
어제는 어머니를 보러 요양병원을 갔다가 정말 너무 속이 상했다. 마침 내가 도착한 시점에 어머니는 또 소리를 지르며 퇴원하겠다고 악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우기고 소리를 지른다는 것 자체가 사실 신체적으로 당신의 상태가 좋아졌다는 반증이다. 처음 요양병원에 입원했을때는 의식만 겨우 있을 정도로 꼼짝도 못했는데 이젠 거동이 불편하더라도 자기 생각을 소리지를 정도의 에너지가 생긴거니까. 그러나 건강이 좋아지면 정신의 피폐함과 망상은 살아난다. 이 요양병원 원장과 간병인이 작당을 하고 자기를 괴롭히려 음식을 한달째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코로 수액과 영양액이 들어간지 한달 가까이 된 이유는 당신이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건강이 상대적으로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자기 스스로는 누웠다가 앉지도..
한국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의 온갖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범죄와 기독교 신앙이 어쩜 그렇게 '찰떡 궁합의 케미'를 보여줄 수 있는지 내게는 항상 일관된 관심과 분석의 대상이다. 너무나 여러가지 이유가 있고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그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아전인수적 신앙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가사나 시중에 나와있는 QT교재를 봐도 대부분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한국교회 비리나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 참담한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이나 공유하는 글들 중에 이런 패턴의 고백도 자주 보인다. '이런 어두운 시대에 저는 주만 바라봅니다.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안타까운 현실 속에 참담한 심정으로 주님만 의지하겠다는 고백은 ..
대학때 선교단체에 있을 때를 비롯해서, 교회를 다닐때도 그랬고...많은 사역자와 신앙인들, 선배와 리더들을 겪어보고 나니 어떤 패턴 같은 걸 발견하게 된다. 순수한 열심, 순수한 사랑같은 것이 있을 때 그런 청년들에게 '먹히는' 신앙적 컬러가 있으니...그건 바로 '비장미 쩌는' 신앙이다. 순교의 신앙, 절대 순종의 신앙, 이 한몸 다 바치는 신앙...등등... 이게 의외로 순진한 청년들이나 아이들에게 잘 먹힌다. 그들에게는 '넘치는 에너지와 열정'을 '투입'할 수 있는 '장르'가 필요하다. 그 곳이 '명분'까지 살려주면 더할 나위 없고, '복잡한 생각'까지 거두어가주면 더욱 고마운거지. 나야 어쩌다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없지만, 만일 내가 아이가 있다면~ 내 아이에게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은 신앙색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