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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오직 내세만을 위해 사는 기독교인과 윌리엄 윌버포스 본문
2014년 세월호 사고가 난지 얼마 안된 시점에 쓴 글입니다. 아직도 그때의 고통과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던 때에는 미처 몰랐지만 세월호 사건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길만큼 커다란 실망과 절망을 느끼게 해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교회안에서는 그토록 '천국'을 갈망하고 '내세'를 사모하는 이들이 어쩜 저렇게 이땅의 천박한 욕망에는 발빠르게 굴면서,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는 편리하게 눈을 가리고 사는지...그것이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그런 제 의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보고자 쓴 글입니다. 이 글을 쓰고나서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해가 되었다고 해서 실망감이 덜한 건 아니었지만요...어쩜 그래서 더 씁쓸하고 안타까왔습니다. 개신교에 대한 저의 실망과 절망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 같습니다. 지난 부활주일 후배 한 명과 종로 보신각 앞에서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렸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탄식, 회개가 예배 내용의 주를 이루었는데 나와 후배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세월호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이 나라 국민들이 너무 불쌍해서…가진 자, 힘 있는 자, 잘난 자 외에는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해 내지 않으면 마지막 남은 생명의 존엄함마저 무너져 버리는 이 땅의 현실이 너무 기가 막혀서…
이 땅에 교회 십자가는 저렇게 많다. 저 십자가들은 생명의 표시일까? 죽음의 표시일까?
<출처: 사진작가 차주용씨 작품>
그리고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불 꺼진 하늘에서 바라보면 온 나라가 빨간 십자가밖에 안 보인다는 이 나라가 어쩌다 이토록 천박한 인명 경시와 배금주의에 물들었을까?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를 외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잘못된 관행과 관례가 수십 년 째 변하지 않는 것일까?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나라 곳곳에서는 불의와 악이 판을 치는 것일까?
난 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현실을 도피하며 내세의 천국만을 위해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하찮게 여기며 내세의 천국만을 위해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
살아오면서 기독교인만큼 ‘현실’에 관심이 없고 ‘내세 지향적’인 인간들도 많이 못 봤다. 대다수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현실 정치’와 ‘사회 참여’에 눈곱 만큼의 관심도 없다. 도리어 기독교인들이 ‘인본주의자’라고 비웃고 깍아내리는 가슴 뜨거운 사회운동가나 노동운동가들이 가장 억울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아픔을 돌보고 있다.
그런 ‘내세 지향적’ 기독교인들이 잘 쓰는 표현들이 있다. 자기들 보기에 가장 숭고한 가치라고 여기는 ‘영혼구원과 교회성장’에 해당하는 것들 외에는 각각의 단어에 ‘세상’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그 가치를 깍아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린 그런 ‘세상’ 일을 하기보다 그 시간에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전도하고 말씀 한 장이라도 더 읽는 게 낫다”는 말을 곧잘 한다. ‘교회’를 주제로 한 것들이 아닌 것들은 다 ‘세상 일’, ‘세상 오락’, ‘세상 영화’, ‘세상 노래’로 그 가치를 깍아 내린다.
난 이런 습관적인 표현에서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이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고 하는데(요한복음3:16) 기독교인들에게 ‘세상’, 즉 이 땅의 ‘현실’은 부차적이고 하찮은 가치인 것이다.
그런데…정말 그런 것일까? 이 땅의 현실을 ‘하찮고 부차적으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은 오로지 ‘교회 일, 전도 프로그램, 선교 행사’에 참여해서 한 명의 사람을 ‘교회등록 교인’으로 만든 것만으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것이 건강한 신앙의 모습일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을 읽어보면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우리가 ‘내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임하길)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이 땅의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시고,
(이 땅에서 먹고 사는 문제 해결해주시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나랑 날마다 부대끼는 저 웬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길)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이 땅의 삶에서 죄와 악의 문제, 유혹의 문제에서 지켜 주시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 6:9~13 새번역 ]
지저분하게 굳이 괄호를 치며 설명했지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내용에는 놀랍게도 단 한 구절도 ‘내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주 기도문의 내용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 땅의 슬픔, 비극, 불의, 부조리, 고통에 눈감지 않고 고개 돌리지 않으며 그 생생한 비극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우는 사람.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는 볼 수 없지만 그런 사람들은 분명 국내외의 여러 곳에서 보이지 않게 그런 삶을 살고 있다. 그 중에 역사적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사람 한 명만 꼽자면 영국의 노예제도를 없애는 데 일평생을 바친 ‘윌리엄 윌버포스’가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만약 한국에 살았다면?
※노예제를 폐지한 윌리엄 윌버포스의 삶을 다룬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2008년 3월 국내개봉)
미국이 노예제를 폐지하게 된 것이 링컨 대통령과 남북전쟁 때문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영국에서 노예제가 어떻게 평화적으로 철폐 되었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만24세인 1784년 영국의 하원의원이 된 후 1787년부터 노예제 폐지에 앞장서며 자신의 인생을 전부 바친다. 결국 1807년 ‘노예무역 금지법안’이 통과되고, 1833년 7월 29일 생을 마감하기 2주 전인 12일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되는 것을 목격하고 숨을 거두었다. 무려 46년이나 걸린 평생의 싸움이자 과업이었다. 2008년에 국내 개봉한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그 싸움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지난한 투쟁이었는지를 감동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정작 기독교인들 조차도 ‘윌리엄 윌버포스’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잠깐 상상력을 발휘해서 상상해보자. 만약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제가 존재했던 한국에 태어나서 정당한 정치적 방법을 가지고 싸우려 했을 때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왜 그런 ‘세상’일에 에너지를 낭비합니까? 노예들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사명입니다!”
'이봐, 자네는 기독교와 노예제도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해. 그건 정치적인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개인적이고 영적인 것이야'
-실제 이 발언은 ‘짐 월리스’의 ‘하나님 편에 서라(IVP)’에서 50년대 백인 종교지도자가 흑인민권운동을 반대하며 발언한 것을 살짝 비튼 것이다-
※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르고 있지만 무려 ‘윌리엄 윌버포스가 직접 쓴 책’이 번역되어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신앙적 멘토는 우리에게 ‘나 같은 죄인 살리신’(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가로 잘 알려진 ‘존 뉴튼’이었다. 그는 한때 노예선 선장이었다가 회심하고 성공회 사제가 된 후 평생을 ‘노예제 철폐’를 위해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윌리엄 윌버포스와 함께 싸운 사람이다. 난 윌리엄 윌버포스, 존 뉴튼, 존 웨슬리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기독교 영성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가장 참혹하고 슬픈 인권유린의 현장인 노예제도에 대해서 당시에 많은 영국의 기독교인들은 그 비극의 현장을 외면하고 합리화 했을 것이다. 실제로 영국은 무임금 노동인 노예제를 통해 자신의 산업과 자본의 상당부분을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노예제를 철폐한다는 건 거대한 기존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러나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기독교인들은 그 참담한 현실 앞에 눈을 감지 않고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명감을 가지고 평생을 바쳐 싸웠고, 고쳐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삶은 ‘내세를 사는 기독교인’과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의 차이를 극명하게 구분해 보여준다.
현실과 끊임없이 ‘불화’하는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
아이러니한 역설이 있다. 현실 속에서 내세를 사는 기독교인들은 현실과 불화할 일이 없다. 왜냐하면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과 비극은 어차피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며 그들에겐 보이지않는 내세의 천국을 위해 영혼만 전도하면 끝나니까. 그러나 현실 속에서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은 사사건건 현실과 불화하게 되어있다. 그들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기위해 끊임없이 현실 속의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싸워 나가니까.
그래서 많은 경우 ‘내세를 사는 기독교인’들은 ‘영혼구원과 전도를 위해서라면 위의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와 함께 현실 속의 불의의 권력과 결탁하거나 타협하며 위정자들의 독재와 기업의 횡포에 눈을 감아버리고 그들과 불화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런 신앙에 물든 교회 지도자들과 목사들은 ‘광주 민주화 항쟁’같은 명백한 불의와 학살 앞에서도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 그 가해자들을 축복해 줄 지언정, 절대 그 학살의 주범들에게는 ‘회개하라’는 메세지를 선포하지 않는다. 그리고 힘없는 피해자들과 교인들에게는 끊임없이 ‘비판하지 마라. 침묵하라. 회개하라’고 외쳐대거나 현실의 불의를 항의하는 자들에게 ‘지나친 정의’라고 꾸짖는다. 게다가 가해자는 일말의 회개와 사과조차 없었는데도 피해자들에게만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당신들이 용서하는 것’이 옳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현실이란 내세에 쌓아둔 하나님 나라 상급에 비례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부와 번영을 확인하는 역할로만 기능한다. 그래서 내세지향적 기독교인이 현실에서는 더욱 탐욕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유형을 드러낸다.
그러나 반대로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들은 현실의 악한 권력자들과 끊임없이 불화하며 세례요한 처럼 자기 아내를 창으로 뚫어 죽이고 자기 아들들까지 권력을 위해 죽이는 서슬퍼런 헤롯의 권세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회개의 메세지’를 선포하다가 죽어간다. 그들은 아이러니하게 진짜 내세와 영생을 믿기에 현실의 부와 번영에 메이지 않으며 불의한 권력이나 가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산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당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끊임없이 갈등하고 격돌했던 예수님에게서도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예수님은 당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눅 11:47~48)
여기서 예언자란 선지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의미한다. 재밌는 건 저 말씀은 지금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은 ‘선지서’ 말씀을 깊이있게 강해 설교하지도 않고 설교 본문으로도 고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선지서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 설교하면 ‘내세를 위해 사는 편안함 보다는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들이 치뤄야 할 불편함’을 말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닐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실을 사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과 끊임없이 ‘불화’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49~53)
맛을 잃은 소금, 비추지 못하는 빛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현실과 불화하며 현실을 살아내는 기독교인이 너무나 부족했기에 어느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인명 경시와 배금주의로 만신창이가 된 나라가 되어 버렸다. 비장애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장애인의 날에 정당한 시위를 벌이는데 최루액을 뿌리는 나라, 수백 명이 죽을지도 모르는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크레인 빌리는데 누가 돈을 낼 건지 따지느라 시간을 허비한 나라, 공부 잘해서 학벌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정규직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라,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받는 급여의 반도 못 받으면서 일은 두 배도 넘게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나라, 친구를 밟고라도 자신의 잘남을 증명해 내지 않으면 앞날이 불투명한 나라, 살아있음이 존중 받아야 할 선물이 아니라, 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지 못하게 한 부모를 원망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장애인의 날 장애인들의 시위에 최루액을 뿌리는 경찰
약자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이런 생지옥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나만이라도 살고 싶다'는 생각에 이민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해 보았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혼자 살겠다고 이 나라를 떠나 버린다면 자기만 살겠다고 탈출한 세월호 선장이나 승무원들과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이 나라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데는 나 같은 기성세대들의 잘못이 제일 크지 않은가? 그리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현실을 내버려둔 우리 기독교인들의 책임은 더욱 크지 않은가?
이 참혹하고 슬픈 현실 앞에 나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뼈아픈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구석 구석에서 제대로 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믿는 사람이 전국민의 1/4이나 된다는 이 나라가 이토록 총체적인 부패와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나라가 되어 버렸을까? 바로 현실을 버려두고 오직 내세만을 위해서 산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라도 이 참담한 현실을 돌이키기 위해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세상의 아픔 가운데 서는 것이다.
그 첫걸음은 바로 ‘내세의 천국’만을 위해 하찮게 여겼던 ‘현실’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내세 덕분에 밀려나 있던 ‘현실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나와 친한 교회 집사님이 아주 쉽게 공감 가는 비유를 말했다. 누가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렸으면 쓰레기를 주우면 되지, 쓰레기를 과연 주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어볼 필요는 없다고. 당신 눈 앞에 쓰레기가 있다면 줍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눈 앞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 있으면 도와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지 말고 그냥 도우면 되는 것이다.
당신이 내세를 위해 현실을 내버려두는 기독교인인지,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기독교인인지 짐작할 수 있는 간단한 질문이 있다.
‘교회일 말고 당신이 항상 신경 쓰고 기도하며 참여하고 있고, 인과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는 ‘현실 속 이슈’는 무엇인가?’
(정치, 사회, 경제, 복지, 교육, 문화~그 무엇이든)
만일 저 질문에 답할 만한 것이 한 가지도 없다면, 당신은 교회 일엔 헌신적인 교인일지 몰라도 결국 ‘내세를 위해 현실을 외면하는’ 기독교인 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당신이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비기독교인 친구가 한두 명도 없다면 당신은 내세 지향적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생전에 대천덕 신부께서 예수원에서 새벽 기도모임을 인도할 때 그날그날의 신문 기사들을 편집하고 복사해서 나눠주며 기도 모임을 인도한 일화는 꽤 유명하다. 왜 그러셨을까? 대천덕 신부는 기독교인들이 이 땅을 살면서 내세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 땅을 변화시키고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하고 기도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그렇게 행동으로 알려 준 것이다.
톰 라이트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개인의 영적 진보를 구하거나 우리의 깊은 감정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 가운데 서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감히 말하건대, 이것이 기독교 영성의 패턴이다. 기독교 영성은 개인의 영적 진보를 구하는 이기적 행위가 아니다. '단독자를 향한 단독자의 비상'도 아니다. 그저 허공을 향한 외침도 아니며, 우리의 깊은 감정을 어루만지는 일도 아니다. 이따끔 이런 것들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말이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세상의 아픔 가운데 서는 행위이며, 세상의 창조자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의 승리로 이 둘을 하나로 잇는 행위다.'
-주 기도와 하나님 나라 (예수님께 배우는 희망과 치유의 기도) 톰 라이트, IVP-중에서
이 나라에 다시 생명의 가치가 회복되게 싸워야겠다. 두 눈 부릅뜨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싸우고 고쳐나가는 것이 가장 낮은 자, 소외된 자, 가장 아픈 자에게 마음을 두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최소한의 신앙 양심이 아닐까?
두 눈 부릅뜨고 참혹한 현실을 똑바로 보고 매 순간 격발되는 분노의 마음을 제어 한다는 게 너무 고통스럽지만, 세월호 참사에 자녀들을 잃은 부모들 마음만 같을까? 그분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연대하며 그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내 나름의 싸움은 어쩌면 이 아픈 현실에 눈을 감지 않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 각자가 간절한 도움과 구원이 필요한 눈앞의 이웃도 구하고 돌보지 않으면서 내세의 천국을 선포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리고 당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당신이 버려두었던 현실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어보자.
<ㅍㅍㅅㅅ 2014년 4월 25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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