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예수믿고 꼭 ‘위대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걸까? 본문

기고글-ㅍㅍㅅㅅ, 뉴스앤조이

예수믿고 꼭 ‘위대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걸까?

에쎌디 2017. 10. 21. 08:00

당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계획?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90년대 선교단체에서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또는 교회에서 어디 선교를 가서 수없이 들이밀며 읽었던 노랑색 CCC의 전도책자 '4영리'의 시작부분이다. 90년대는 '꿈과 비전' 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엄청나게 유행했던 시절이었다. 나또한 가장 좋아했던 책들이 대체로 '비전'이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갔던 책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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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C 빌 브라이트 박사가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만든 전도지. 성경의 핵심진리를 ‘4가지 영적원리’로 간략하게 추려서 설명한 4영리 전도지

어제 독서모임에서 오랜만에 90년대 거의 뜨겁게 모든 책을 섭렵했던 '찰스 콜슨'의 글을 '도시의 소크라테스'(새물결 플러스)라는 책에서 읽었다. 낯익은 그의 논리, 그의 표현들이 눈에 띄었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은혜가 있기도 했지만 어떤 부분은 동의가 안되는 부분도 꽤 많았다. 그가 변했던지, 아님 내가 변했기 때문이겠지 그중에 이런 표현들이 꽤 많이 등장했는데

'여러분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삶에 목적이 있음을 이해함으로써 참으로 가슴뛰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여러분에게 위대한 목적을 선사합니다'

참 오랜만에 읽어보는 낯익은 표현이었다. 자기개발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고, (물론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없겠지만)  90년대부터 그 맥락이 면면히 이어오는 꿈과 비전을 통한 신앙관과 마침 그때쯤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자기개발서 붐에는 묘한 공통점과 주장의 유사성이 있다.

'당신은 위대한 삶을 살 자격이 있으니 그 인생을 누리라(또는 쟁취하라)' 는 메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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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책들, 거인은 끝내 깨어나지 못했고...ㅡ.ㅡ;

90년대의 나라면 이런 표현을 읽고 가슴이 설레고 뜨거워졌겠지. 그러나 어제는 그 부분들을 읽으며 마음 한 켠이 불편하고 전혀 동의가 안되었다.

원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위대한 계획'이 있다는 말이 맞을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표현의 이면에는 우리가 '위대한 계획'에 동참하고 위대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은 무가치한 삶이라는 '번영주의 신학'의 가치관이나 '성과나 업적이 반드시 있어야만 존재할 가치가 있는' 자본주의적 존재론이 교묘하게 투사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보니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겠는데,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계획'이라는 표현을 갖다붙이기에 내가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은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으니까. 위대한 꿈을 꿀 수는 있었지만(몽상은 누구나 자유니까)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지불하기에 난 너무 의지박약에, 저질체력에, 성격파탄에,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데 내 삶은 왜 이럴까…?

그저 내게 주어진 힘겨운 하루 하루의 삶을 감당하기에도 난 벅차고 버겁기만 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라는 표현은 내 삶과 전혀 상관없는 공허한 단어들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이가 들며 주위의 친구들과 후배들을 보아도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들 비슷 비슷한 초라함과 평범함, 비루함이 뒤섞인 삶을 살고 있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라는 말,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라는 말들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대다수의 평범하고 못난 나같은 신앙인들을 보아오면서 자괴감도 느끼고 실망할 때도 많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내 신앙관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만으로 충분하다

4영리의 시작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로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로 시작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내가 만일 누군가에 전도를 한다면  '예수믿는다고 반드시 당신의 초라한 삶이 럭셔리하게 변하거나, 위대한 삶을 살게되는 건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게 될 것 같다.

그 사랑은 목숨을 바친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위대하지 않고, 앞으로도 위대해질 가능성이 희박한'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 하나 만으로도 족하다.

당신이 설사 예수를 믿고 회심을 경험했더라도 '위대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목적의식에 지나치게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당신이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그분도 잘 알고 계셨으니까. 그리고 예수믿어도 여전히 주변에 민폐를 끼치고 성격나쁘고, 초라하고 비굴한 삶을 살 가능성이 99.9%라는 걸 누구보다 잘알고 계셨을테니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초라하고 위대함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당신을 사랑하셔서' 목숨을 버린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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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동네 화원의 꽃들

위대한 존재가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그 사랑을 기억하고 이 힘겹고 고단한 세상을 살아낼 힘을 얻는 것 만으로도 그분은 당신을 기뻐하실 것이다. 너무 지쳐 살고 싶지 않은 순간, 그래도 날 사랑해서 목숨을 버린 신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루 하루 포기하지 않고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고난받는 이웃을 돕고 소박하게 이 땅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위대함은 그분의 몫이지, 우리의 몫은 아니니까.

이 야만스럽고 절망스런 세상에서 내가 절망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아프고 약한 이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예수의 사랑이 내 안에 있는 한...난 초라할지언정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만으로 충분하다. 당신이 앞으로 여전히 위대하지 않고 초라한 삶을 살게되더라도 그 위대한 사랑은 당신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랑을 기억한다면 마땅히  우리도 잘나고 성공하고 예수믿고 신분상승한 사람들을 사모하기보다...위대하지 않은 작고 소박한 것들, 못난 존재들, 고통받는 이웃들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의 '서시'중-


오늘은 '위대하지 않은', 앞으로도 여전히 '위대해질 가능성이 희박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의 '위대한' 사랑을 묵상하기 좋은 날이다.



※출처: Bible TV Series <2016년 3월 25일 ㅍㅍㅅㅅ 기고>

작년 고난주간 마지막 날 아침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 전날 독서모임에서 대학 때 엄청나게 좋아했던 '찰스 콜슨'의 강연글을 읽었는데~대학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닿더군요. 그의 주장에 동의도 안 되고, 부대끼고, 그는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전 아마 많이도 변했나 봅니다. '그와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위대한 삶의 비전'으로 열정이 충만했는데, 전 그렇지 않더군요. 위대함...그거 뭘까? 꼭 위대해져야 하나?...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윤동주의 '서시'가 더 감동적으로 와닿습니다. 스러져가고 초라하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그건 어쩌면 나 자신일수도 있는데, 그 모든 것의 한계와 현실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려는 모습...그 태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위대하고 화려한 것들을 사모하기보다 그저 소박하고 초라한 모습 그대로 이 세상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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