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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기독교인이야말로 정치 견제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 본문
※ 2014년 6월에 '기독교인과 정치'라는 주제로 두번에 걸쳐 기고했던 글중 두번째 글입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더 나아가 올바른 정치적 견제활동에 앞장서야 되는지를 이야기한 글입니다. 모든 문제를 개인화시켜서 결국 성공하고 부자되면 내가 기도열심히 하고 노력해서 된거고, 실패하고 가난한 사람은 다 네가 게으르고 기도안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정말 많죠. 그런 이들에게 '이웃의 고통'이란 그저 자업자득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을겁니다. 그런 이들이 생각을 고쳐먹고 연대와 견제, 감시활동에 적극 나서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쓴 글입니다.
기독교인이야말로 정치 견제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중의 하나는 ‘나 한사람만 윤리적이고 기독교적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면 이 세상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될것이다’라는 생각이다.
물론, 각성된 ‘한 사람’의 힘과 영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한 사람이 각성해서 싸우고 노력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소명을 다할 때 영국의 노예제를 폐지한‘윌리엄 윌버포스’나 ‘반올림’을 조직해서 삼성 전자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에 대한 회사측의 공식사과와 보상합의를 이끌어낸 ‘황상기’씨 처럼 놀라운 일들을 해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앞서 예를 든 윌리엄 윌버포스, 황상기씨도 혼자만 그런 싸움을 싸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알았고 그들을 돕는 무수히 많은 동지와 동역자들이 있었다. ※삼일교회 교인들은 교회앞에서 5월18일, 25일 두번에 걸쳐 1299명이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에 동참해 주었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만 잘하면 된다’는 ‘개인 환원 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로 약자들의 연대와 협력, 시민들의 각성을 이끌어내는 단체행동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중에 가장 중요한 행동이 ‘비대칭적 견제와 감시’활동이다.
‘비대칭적 견제와 감시활동’이란 특정 분야가 부패하고 썩어서 문제가 많을 경우, 그 분야 종사자들에게만 직업적 소명과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그 이해관계에서 비켜서있는 시민들이나 타분야 인사들이 그 분야의 자정작용을 위해 힘을 써주고 연대하는 활동을 말한다.(시민의 사회참여활동 중 견제와 감시 기능.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파놉티콘’의 반대개념. ‘시놉티콘’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언론이 썩어있어서 온 국민이 진실된 정보를 보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라면 언론인들에게만 그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TV를 보고 신문을 보는 시민들이 단체행동에 나서서 견제하며 올바른 언론사를 만들기 위해 힘써주는 활동이다. 그리고 교회의 담임목사나 장로들이 부패하고 전횡을 휘두르면, 직업인으로서의 생사여탈권을 갖고있는 담임목사나 장로에게 항명하기 어려운 부목사들에게만 올바른 행동과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제직회를 소집하고 항의하고 소통하며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기관과 공권력이 부패해 있다면 거기 종사자들에게만 책임을 묻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이해관계에서 비껴서 있는 시민들이 깨어서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견제하고 감시하는 ‘비대칭적 견제와 감시’가 활성화 될 때 이 사회와 나라는 분명 더 건강하고 살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비대칭적 견제와 감시를 하기 위해 하는 활동이 ‘시민참여활동’인데 영국의 경우는 시민참여활동을 한번이라도 한적이 있는 시민이 전국민의 무려 90%를 상회한다. 특히 최근의 경우는 SNS와 인터넷, 스마트폰 혁명으로 직접 현장에 가지 않아도 직간접적인 다양한 방법으로 의정활동을 감시하거나 견제하고, 후원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참고: 정치 지켜보는 시민 파수꾼위한 앱과 웹 6종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파수꾼
예수님이 말했듯이 기독교인들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한다.(마태복음10:16)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상당수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가장 속이기 쉽고, 기만하기 쉬운 무지몽매한 대중이 되어버렸다. 단지 교회만 다니고, 기독교인이기만 하면, 또는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 집사같은 그럴듯한 직분만 있으면 덮어놓고 지지하고 찍어주니까.
언제까지 덮어놓고 속여먹기 제일 쉬운 무지몽매한 대중으로 기독교인들이 바보짓을 할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앞으로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간사한 정치인들의 밥이 될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제는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교회만 다니면 덮어놓고 지지해주는 것에서 탈피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그 후보나 정당이 지지하는 가치가 충분히 공동선에 기여하고, 다수 지역 주민과 국민의 권익과 존엄을 지키는 ‘기독교적인’ 것이라면 정치인의 종교가 ‘불교’이건, ‘무교’이건 상관없이 그 정치인을 지지하고 뽑아줄 수 있는 정치적인 성숙함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이 교회생활에만 매몰되어(또는 그 반대로 너무 세속화되고 이기적이되어)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회적 이슈에 별로 관심도 없고,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를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분별하는 훈련이 안된채 사안을 너무 단순화시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고 이해관계가 여러가지 양상으로 얽혀있는 현대사회에서 다수의 공동선을 위해 무엇이 유익한지 올바른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에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한 예로 2014년에 국회에 입법예고가 끝나고 상임위와 본회의 통과만 앞두고 있었던 '차별금지법'을 반대해야 한다며 기독교인들은 참으로 열심히 카톡과 문자를 퍼날랐다. 그 문자와 카톡을 퍼나르던 교회 후배와 지인들 열 댓명에게 물어보았을 때 ‘차별금지법’ 법안을 직접 읽어본 사람은 놀랍게도 단 한 명도 없었다. 차별금지법에 반대를 하건, 찬성을 하건 그 법안에 대해 최소한 본인이 직접 읽어는 보고, 여러가지 전문가들의 견해도 참고하며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민주주의 시대 시민으로서 정상적인 모습이 아닌가?
그 결과 우리나라는 부끄럽게도 OECD국가 중에서 ‘차별금지법'이 없는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종이나 종교, 사상, 성별, 장애, 기타 어떤 이유로든 차별을 금지하고 인간의 보편적 인권을 보호하자는 ‘차별금지법'을 오직 동성애 이슈로만 왜곡하여 주도적으로 반대한 사람들이 대부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기독교인이었다. 배척과 차별을 앞장서서 찬성하고 주장하는 혐오와 차별의 종교가 참된 기독교일까?
※ '차별금지법' 찬성하면 북한을 이롭게 한다고?-동성애를 무기로 차별금지법을 왜곡하는 기독교
자기가 직접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고 다들 ‘친한 목사님이 말씀하셨는데~' , '어디 선교사님이 그러시는데~', '존경하는 권사님이 이야기하시는데~' 라며 생각없이 퍼나르고, 선동당하면서 오랜기간 많은 이들이 피흘리며 쟁취해낸 민주시민의 고귀한 권리를 무책임하게 직무유기하고 있다.
그러니 교회만큼 목회자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쉽게 대중을 세뇌하고 특정 후보를 찍도록 유도하기 쉬운 곳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정치에 관심도 없으면서 걸핏하면 '긴급기도부탁! 이슬람에 계신 00선교사님께서 말하길...' 이라며 근거도 없고 확인도 안된 (심지어 그 00선교사를 아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으면서) 카톡과 문자를 퍼나르는 기독교인들이 주변에 넘치는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기독교인들도 올바른 유권자의 권리를 행사하려면 수고스럽지만 깐깐하게 따져보는 시민으로서 개인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생각하고 판단할 책임을 목사에게, 신앙선배에게 이양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명백한 직무유기일 뿐이다.
※2014.06.04 [지방선거 투표독려 포스터] -디자인: 권대원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행사하는 것이 수고스럽고 복잡한 이 시대에 기독교인이 기억해야할 말씀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누구보다 ‘깨어 있어야 할’ 파수꾼의 사명을 이야기하신 ‘에스겔서’ 말씀이 아닐까? 에스겔서 33장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신자의 소명에 대한 구약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어떤 나라에 전쟁이 이르게 할 때에, 그 나라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자.
이 파수꾼은 자기 나라로 적군이 접근하여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자기 백성에게 경고를 하였는데도 어떤 사람이 그 나팔 소리를 분명히 듣고서도 경고를 무시해서, 적군이 이르러 그를 덮치면, 그가 죽은 것은 자기 탓이다.
그는 나팔 소리를 듣고서도 그 경고를 무시하였으니, 죽어도 자기 탓인 것이다. 그러나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듣고서 경고를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파수꾼이, 적군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고, 적군이 이르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덮쳤다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파수꾼에게 묻겠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에스겔 33:2~7 새번역]
기독교인은 사리분별 못하고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유명하고 권위만 있어 보이면 무슨 망언을 지껄여도 ‘아멘’으로 화답하는 무지몽매한 대중으로 부름받지 않았다. 기독교인은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수고스럽지만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알아보고, 더 꼼꼼하게 점검해야 할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았다. 교회다닌다고, 장로라고, 우리교회 교인이라고 덮어놓고 찍어주시는 분들...이번 선거에서는 제발 그러지 좀 말자.
참, 알고 있는가? 나찌정권의 유대인 학살을 도와 1급 전범으로 재판받아 사형당한 아돌프 아이히만도 소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칼 아돌프 아이히만, (1906.3.19~1962.5.31)
※ ‘1962년 5월 31일,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 외곽에 위치한 라믈레 교도소, 자정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사형 집행을 참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앞에 초로의 남자가 교도관들의 호송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남자는 별 동요의 기색이 없었습니다. 교수대에 오르기 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나하고 연고가 있는 이 세 나라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쟁 규칙에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참관자들을 향해 이야기하죠. “여러분, 또 만납시다. 이게 운명이라는 거요. 나는 지금까지 신을 믿으며 살아왔고, 신을 믿으면서 죽어갈 거요.” 그의 얼굴에선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행위를 후회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칼 아돌프 아이히만’ (Karl Adolf Eichmann), 나치 친위대의 중령이었으며 2차 대전 기간 중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장본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출처: http://blog.ohmynews.com/gompd/150929 <2014년 6월4일 ㅍㅍㅅㅅ기고> ※글이 좋았다면 공감버튼이나 댓글을 부탁드려요.~^^ (로그인 없이 가능합니다) '카카오 스토리 채널'에서도 제 글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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