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사랑과 관용의 예수, 혐오와 차별의 교회 본문

기고글-ㅍㅍㅅㅅ, 뉴스앤조이

사랑과 관용의 예수, 혐오와 차별의 교회

에쎌디 2017. 12. 18. 13:32

※ 2017년 2월에 '뉴스앤조이'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사랑보다 혐오, 관용보다 차별을 앞세우는 한국 개신교에 대한 글입니다. 예수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너그러움, 자비, 사랑의 이미지가 왜 개신교인들과 교회를 생각할때는 영 어색한 것일까요? 사랑과 관용의 예수, 혐오와 차별의 교회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간디의 이 말처럼 지금 이 사회에서 예수는 좋은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교회는 싫다고 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간디가 정확하게 지적했듯 예수와 그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닮지 않았는지 따져보면 꽤 많은 차이를 분석해 낼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수는 당시 사람들이 놀랄 만큼 파격적으로 사랑과 관용의 정신과 행동들을 보여주며 이타적인 사랑을 보여준 데 비해, 지금의 교회와 기독교인은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며, 이기주의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여준 차이일 것이다.


비신앙인들은 성경도 잘 모르고 교리나 신학은 더욱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추구했던 가치와 지금의 교회와 개신교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것은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변명을 해도 그들은 속지 않는다.


예수를 따른다는 자들이 번영과 돈을 추구하고, 불의의 권력을 옹호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여성을 차별하는 데 앞장서고, 온갖 부정과 횡령, 부끄러운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셨다고 스스로 선포하는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며 그들이 예수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을까?


예수는 당대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손가락질받던 온갖 죄인과 민족반역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품어주고 변화시키는 놀라운 사랑과 관용의 모습을 보이셨다. 그러나 그를 따른다는 지금의 교회와 교인들은 자기들의 이익만을 챙기며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고 근거 없는 거짓선동을 퍼뜨리는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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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도레 판화: 어린이를 축복하신 예수


이렇게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예수의 모습에서 동떨어져 변질한 이유가 뭘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는 오직 교회 안에만 매몰되어 세상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교회 매몰적 신앙이 차별적 세계관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나와 그들, 구원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 우리 교회 교인과 교인이 아닌 자 등의 차별적 인식이 너무나 쉽게 생성되기 좋은 것이다. 게다가 교회 밖 세상의 문제나 이슈는 전혀 교회에서 다루지 않거나 다루더라도 지나치게 편협하고 단순화된 가르침으로 세상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왜곡시킨다.


게다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르는' 상대에 대해 두려움과 적의를 갖게 된다. 세상을 잘 모르고, 교회 밖 비신앙인들을 잘 모르고, 우리 교회 아닌 이들을 잘 모르기에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두려움과 적의가 있다. 게다가 소위 교회 안에서 절대 권위를 갖는 목사나 장로, 직분자들이 확인되지도 않은 거짓 루머와 악의적인 정보와 메세지를 설교나 카톡으로 퍼뜨리기 시작하면 그들을 존경하고 따르는 교인들은 마치 세상이 지금이라도 당장 망할 것 같은 두려움으로 거짓 뉴스와 혐오를 퍼뜨린다. 교회단톡방이 온갖 거짓루머와 선동의 주요한 근원지로 악명을 떨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에서다.



※거짓루머를 퍼뜨리지 않는 기독교인이 되기위한 원칙 ㅍㅍㅅㅅ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윤리와 가치를 지지하는 것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같다고 생각하는 착각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천 년 전 행보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것은 당시 명백한 죄인으로 손가락질받던 창기와 로마군인, 세리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시고 식사까지 같이하며 교제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들을 한 두 번 만나주신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이를 보고 당대의 율법학자들이자 종교기득권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바리새 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 마태복음서‬ ‭9:10-11‬ ‭새번역 -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고 식사를 같이하고 어울리는 것 자체를 그들의 죄에 동참한다고 생각하고 정죄하였다. 지금의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이천 년 전 예수의 행동을 정죄했던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과 같은 고정관념과 편견에 젖어있다. 그들이 믿고 따르고 추구해야 하는 가치와 윤리를 지키는 것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을 동일한 가치로 착각하는 것이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다른 종교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가정을 지키고 건전한 성 윤리가 옳다고 믿는 것과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전문직 성범죄 1위 직업군은 목사니까 차라리 목사들을 혐오하면 또 모를까)



전문직성범죄.jpg
성범죄 가장 많은 전문직은 성직자


그러나 예수는 그러지 않으셨다. 예수는 사마리아여인, 창기, 세리, 과격한 열심당 당원, 율법학자, 노예, 군인, 부자 등 거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셨다. 그리고 그런 그의 너그러운 사랑이 그들을 변화시켰다.


얼마 전 어느 교회의 결혼예식신청과 관련된 안내문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아래 사항에 해당하는 경우는 신청할 수 없습니다.

1) 신랑, 신부의 세례여부 미확인

2) 혼전동거

3) 임신으로 인한 결혼

4) 재혼


예전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당연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좀 불편하게 다가왔다. 위에 적힌 내용은 결혼에 대해 교회가 추구하고 권면해야 할 당연한 가치를 반영한 것이지만, 그런 가치를 추구한다고 해서 그를 지키지 못하고 따르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할 필요가 있을까? 세례를 받지 못했고, 혼전 동거를 했고, 임신했고, 이혼의 상처를 딛고 재혼했다고 해서 그들의 결혼을 교회에서 축복해주는 게 그리 잘못된 것일까? 내 주변에 이혼한 지인들도 적지 않고 재혼한 분들도 몇 분 있다. 나도 이렇게 기분이 불쾌한데 그분들이 저 안내문을 보면 얼마나 상처받을까?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의 인생을 바꾼 것은 미리엘 주교의 용서와 사랑이었다. 호의를 베푼 주교의 은혜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혀온 장발장에게 은촛대까지 주며 그를 감싸 안은 미리엘 주교의 관용과 사랑이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찼던 장발장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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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미제라블’ 중에서


나는 교회가 팍팍하고 삭막한 이 세상에 예수의 너그러운 사랑과 관용의 정신을 실천하며 교회 밖 세상을 껴안고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 안에만 매몰되어 살아선 안 된다. 세상을 알아야 하고, 교회 밖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전도 폭발 집회만 할 것이 아니라 귀한 인간을 한낱 수단으로 여기고 착취하는 사회의 구조와 잘못된 관행을 고쳐나가는데 관심과 역량을 기울여야 한다.


세상은 노력이 부족하고 능력이 안 되면 차별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교회는 능력이 있건 없건 누구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에 차별 없이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몇 년 전 미국의 금융위기로 수많은 실직자들이 생기고, 노숙하는 이들이 늘어났을 때 한 천주교 성당에서 예배당을 오갈 데 없는 이들이 쉴 수 있는 거처로 내어줬는데 이를 찍은 동영상을 봤었다. 심지어 예배가 드려지는 와중에도 이들이 계속 쉴 수 있게 교회 측은 배려해줬다. 그들이 예배당 안으로 찾아와 쉬고 눕는 모습을 몇 분간 담담히 보여준 영상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와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 영상 속의 교회처럼 아무런 편견 없이 아프고 힘든 이들을 위로하고 쉬게 하는 교회의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봤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랑과 관용의 예수를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너무 오랜만에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의 교회에서도 차별없이 너그럽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예수의 사랑을 보면 좋겠다.


거짓으로 가득한 근거 없는 카톡만 퍼뜨리고 태극기 휘날리며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는 교회의 모습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예수는 그러지 않으셨으니까. [2017년 2월 16일 뉴스앤조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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