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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기복신앙이 신앙을 변질시키는 이유 본문
※ 작년3월에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8년 새해를 맞아 서로에게 복을 기원하지만, 신앙의 초점이 '복'에게만 맞춰져서는 안되겠죠. 기복신앙의 위험성에 대해 써본 글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할 수는 있지만, 우린 언제나 신앙이 변질될 위험이 있음을 경계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자체에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기복신앙이 신앙을 변질시키는 이유
한국교회를 타락시킨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기복신앙’ 때문이라고들 한다. 흔히 ‘5중 복음 삼박자 축복’으로 대표되는 기복신앙이 한국교회의 엄청난 양적 성장을 가져왔지만, 그와 함께 많은 부작용과 복음의 변질을 가져왔다고 본다. 모든 종교에는 고통과 질병에서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바를 간구하고 복 받기 바라는 ‘기복’적인 면이 있다. 성경의 이야기도 예외는 아닌데, 성경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 하나님께 축복받기 원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길 간구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난 솔직히 신앙의 여러 다양한 모습 가운데 ‘기복적인’ 측면을 없애버리고 쫓아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종교성과 신을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의 중심에는 축복을 기원하고 현세의 문제가 해결되기 바라는 뿌리깊은 의식이 있으므로 종교성을 가진 인간에게 기복적인 모습자체는 자연스럽다.
※한 시대를 풍미해던...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마태복음 7:9~11-(새번역)
그러므로 난 기복신앙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기복신앙의 ‘복 받는 주체’가 항상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라 생각한다. 갓난아기의 세상은 온 우주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이 구하는 것은 오직 자기 필요, 자기 욕망, 자기 꿈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오직 자기 필요, 자기 욕망, 자기 꿈만을 위해 모든 것을 구한다면 그건 어른이 아니라 아직 갓난아기의 미숙한 상태라는 증거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에는 타인과 이웃을 위한 필요와 축복이 별로 없다. 오로지 자기 성공, 자기 교회 부흥, 자기 교단의 교세를 늘리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사회의 아픔과 그늘을 돌아볼 생각이 없으므로 비판받는 것이다.
내가 아는 아프리카의 선교사님은 열악한 환경과 재정 가운데서 긴급한 필요를 간절히 구하는 중보기도 메일과 카톡을 주신다. 그런 선교사님의 메일과 중보기도 요청을 받으면서 그 누구도 ‘기복신앙’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선교사님은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그가 돕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아마 아름다운 기복신앙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가 구하는 복이 자기만을 위한 복이 아니라 타인과 이웃의 필요,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구하는 기복신앙이라면 그런 기복신앙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복신앙에는 신앙을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기도 응답과 관련된 문제이다.
첫 번째는 오래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가 누적된 시간이 10년이라면 회복되는데 걸리는 시간도 그쯤 걸린다고 봐야 한다. 어떤 문제가 10년째 누적된 원인으로 발생했다면 완전히 회복시키는 데도 족히 10년은 걸린다고 봐야한다. 그러나 인간은 간사하고 어리석어서 문제가 누적된 기간만큼 회복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고 주저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가짜 신앙, 가짜 치유, 무당과 돌팔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기복신앙의 탈을 쓰고 우리를 유혹해 온다. '당신의 문제나 당신의 병이 10년째 누적되어 온 것이지만 나만 믿으면 (내 말대로만 하면) 단번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속이면서 종교적 헌신을 강요한다. 이렇게 말하고 유혹하는 사람들, 종교와 책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십중팔구 당신의 간절함을 이용해 자기의 배를 채우려는 사기꾼일 테니까.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예수 / 찰스 드라 포세 1680
심지어 40일을 굶은 예수께서도 지금 당장 당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이 돌을 떡으로 변하게 하여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마귀의 지극히 설득력 있는 유혹을 물리치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마태복음서 4:1-4 -(새번역)
난 그 모습에서 예수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땀 흘려 먹고 살아가는 인간의 길을 걸어 가시겠다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유혹을 뿌리치며 예수는 이렇게 선포하신 것이다.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신의 권능으로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들 삶의 고단함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서라고.
예수께서도 메시아의 능력을 이용하여 인생의 지름길로 가지 않으셨는데 인간들은 자꾸 '단번에 해결 가능한' 가짜 해결책을 제시하는 종교와 사기꾼들에게 농락당한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한다고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실 거라는 생각은 기복신앙이 변질하여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흔한 부작용이다.
문제가 오래되었으면 회복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지름길을 알려주겠다고 유혹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우상숭배와 샤머니즘의 길이다. 광야에서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빌미로 성전에서 뛰어내려 화려하게 메시아임을 드러내라고 예수를 유혹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미끼로 지름길로 가라고 유혹하는 것은 사탄의 목소리다. 예수는 그 유혹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의 변방에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더디게 메시아의 길을 걸어가셨다. 참된 신앙은 지름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가는 것이다. 더디더라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그러나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거라고 속이지 않는다.
두 번째는 기도의 응답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과 부재함을 느끼는 미숙한 신앙의 위험성이다.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는 기복신앙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자신이 기도한 것을 응답받거나 받지 못하는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거나 의심한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얼마나 자주 응답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측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린 신앙인가?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미숙한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리려는 신앙인들이 많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간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하기에 좋은 첫걸음일 수 있다. 그러나 내 기도에 얼마나 자주 응답하느냐는 하나님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때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 그분은 상당 기간 침묵하시고 응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기도하고 간절히 구하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배반하는 실패와 낙담을 경험할 때도 많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기도 응답을 못 받을 때가 있고, 사업에 실패할 때가 있고, 건강을 잃어 암에 걸릴 때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을 때가 있다.
기도 응답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의 대표적인 예가 ‘욥’의 이야기다. 욥은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사탄과 내기를 하는 바람에 졸지에 모든 것이 망하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죽고, 자기의 건강도 잃어버린다. 욥기의 이야기는 난해하며 해석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욥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축복받는 삶의 인과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기도 열심히 한다고 만사형통하고, 신앙 좋다고 삶의 비극이 모두 피해가며, 교회에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무병장수하고 행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착하고 신앙 좋고 이웃을 사랑하며, 교회봉사에 헌신적인데도 불구하고 삶의 비극과 아픔이 끊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기복신앙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이 땅의 삶에는 허다하다.
욥, 얀 리번스 1631
기복신앙의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너무 단순한 인과관계의 원리로 바라보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비극을 겪거나, 불행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우울증에 걸린 것은 ‘충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몇가지 이유로 다 설명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그런 단순한 신앙의 인과관계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발버둥 치지만 끝내 그 뜻을 알 수 없어 낙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설교시간에 인생의 문제와 고난의 문제를 쉽고 안일하게 기계적으로 다루곤 한다.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난제 앞에서 벼랑 끝에 선 교인들은 그런 설교를 들으며 자기 삶을 자책하고 낙심에 빠진다.
기복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단순한 인과관계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석하려는 데에 있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한 걸음 더 성숙한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과 삶의 부조리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없을지라도, 내가 처한 막막한 삶에서 여전히 그분이 동행하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교회와 신앙인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신앙인들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결국, 실패한 삶, 응답받지 못한 기도를 충분히 체험한 사람들만이 그런 신앙이 있지 않을까? 자신이 원하고 기도하던 것에 응답받지 못했어도 변함없이 날 사랑하시는 예수를 체험한 사람만이 그런 신앙을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기도 응답받은 성공의 고백으로만 넘쳐나는 교회가 좀 불편하다. 역설적이게도 기도 응답받지 못한 아픔과 고통을 고백하는 교회와 교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램프의 요정’이 아니라 삶의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도 변함없이 동행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난다.
어쩌면 하나님은 침묵하는 시간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타인의 고통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것일지 모른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고통스러운 깨어짐의 시간이 없이는 오로지 자기의 필요, 자기의 욕망에만 집중하고 기도할테니까.
이제 한국교회에는 믿음 안에서 무엇이든 가능하며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5중 복음 삼박자 축복’을 외치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박국의 노래를 들려줄 선지자가 필요하다. 기도응답이 없는 실패와 낙담의 현장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신앙인들이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
-하박국 3:17~19-(새번역)
<2017 년 3월5일 뉴스앤조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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