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이웃을 잃어버린 기독교 본문

기고글-ㅍㅍㅅㅅ, 뉴스앤조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이웃을 잃어버린 기독교

에쎌디 2017. 10. 11. 00:19

보수적이고 교회밖에 모르던 내 신앙의 색깔이 변하게 된 커다란 변곡점이 몇 가지 있는데, 이 글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변곡점 3개를 풀어낸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3개의 변곡점은 하나의 공통된 키워드를 가지고 있었죠. 바로 '이웃 사랑'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이 글은 길기도 참 길지만 글 쓰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글일 겁니다. 꼬박 13시간 정도 이글을 쓰는데 매달렸던 것 같아요. 글쓰면서도 아팠고,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이 아픈 글 중의 하나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이웃을 잃어버린 기독교


2,000년 전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시험삼아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태복음 22:36~40]


성경에 많은 가르침이 있어도, 예수님은 명쾌하게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두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말씀하였다. 현재 기독교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측정할 수 없으니 말할 수 없다치더라도, 바로 자기 주변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는 명백히 실패하는 것 같다. 총동원 전도 주일이나 특별한 전도집회를 앞두고 교회에 호감을 나타내는 잠재적으로 교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아니면 교인들은 직장동료든, 바로 옆에 사는 이웃이든 별로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교회를 안 다니는 이웃의 삶에 대해서는 아예 무관심하거나, 신촌 퀴어 퍼레이드를 통해 드러나듯  신앙적으로 자신이 용납할 수 없다고 규정하는 타자에 대해서는 이웃이라고도 여기지 않으며 극도의 혐오심만을 드러낸다.

이웃의 생각과 가치관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이웃들을 존중하고 너그러운 사랑과 관용으로 함께 어울리는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은 여간해선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에 충성스러운 교인들은 그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교인들하고만 사귀며, 교회 일에만 몰입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교회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이웃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외면했던 이웃들에 대한 나의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이웃 이야기 1- 용산 남일당

2009년 1월20일, 난 통영에서 이틀째 단기선교중이었다. 사역을 마치고 하루의 피로를 풀겸 들른 목욕탕에서 TV를 통해 용산참사 뉴스를 보았다. 용산역 바로 앞 아주 익숙한 거리, 한강로2가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에서 경찰, 용역,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의 충돌가운데 대형화재가 발생해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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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일당 참사-2009년 1월20일 경찰과 용역의 무리한 진압과 세입자들과 전철연회원들의 공방으로 화재가 발생,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1명이 사망했다.


TV화면에 비친 거센 불길은 통제할 수 없는 듯 했고, 결국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교회가 현장 근처이기도 하고 아주 낯익은 거리라 충격이 컸지만 나는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흔한(?) 건물주나 재개발조합과 세입자들간의 갈등가운데 우발적으로 갈등이 심해져 그런 일이 벌어졌을 거라는 것을 기사의 제목들로만 피상적으로만 추측할 뿐...깊이 관심을 두진 않았다. 안타깝긴 하지만 당시 살아남느냐 마느냐 고군분투하고 있던 개인사업과 내 앞가림이 더 급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있어 사무실을 옮겨야 할 일이 생겼다. 마침 교회와도 가깝고 내 거처와도 가까운 넓고 괜찮은 사무실이 있어 계약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곳이 남일당 사고 현장에서 채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남일당 사고 후 유족들과 그들을 돕는 시민단체, 전철연 회원들, 천주교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은 남일당 건물 1층에서 추모 미사 드리는 처소와 농성장 겸 숙식을 겸하고 있었고 난 매일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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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일당 화재 유족들이 추모미사를 드리고 있다.


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매일 그 앞을 지나며 피해자 유족들이 그 거리에서 노숙하고, 추모 미사를 드리며, 집회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점차 그분들의 슬픔 가득한 표정과 외롭고 고단한 싸움이 마음 속에 남기 시작했다. 점차 관심을 가지고  인터넷으로 ‘남일당’사태에 대한 글과 기사들을 상세히 찾아보았다. 남일당 사태가 벌어진 전후사정을 자세히 알아 보면서 경찰이 필요 이상의 과도하고 무리한 진압을 시도했다는 점(이 부분은 2012년 개봉한 다큐영화 '두개의 문'에서 상세히 다루고있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그분들이 너무도 억울하게 삶의 거처를 빼앗겼다는 점, 그분들이 요구한 것은 최소한의 생존권이었다는 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분노했다.

‘왜 국가 공권력은 부자와 강자의 편에만 서는가?’라는 회의와 함께,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있다고 자랑하는 대형교회인 우리교회는 왜 이들을 돕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솟아났다. (내가 다닌 교회와 남일당은 버스정류장으로 두 정거장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시스템과 제도의 부조리함에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고 돕는 것에는 무관심하거나 무력한 기독교인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점차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남일당 앞 거리에서 드려지던 추모 미사 곁을 지나가는데 내 앞에 걸어가던 아저씨들의 대화가 내 귀에 꽂혔다.


‘천주교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은 저런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항상 앞장서는데...개신교 새끼들은 코빼기 한번 안비춘단 말야’


‘맞아, 그 새끼들은 교회예배당 큰 거 짓는 거 빼곤 관심없잖아’


그분들 바로 뒤에서 걸어가던 난 얼굴이 화끈거려서 일부러 다른 골목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더는 그 아저씨들의 대화를 들을 자신이 없어서…




얼마 후 다시 사무실을 옮겨서 그곳을 떠난지 얼마 안되어 용산참사 유족들과 정부측과의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으나 ‘남일당’은 내가 왜 이 사회의 부조리와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알아야 하며,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 이런 사안에 대해 기독교인과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남일당에서 목격한 고통받는 이웃들의 모습은 내 신앙의 관심과 방향이 ‘지금 이 사회에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두개의문.jpg ※2012년 6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두개의 문’은 남일당 참사가 왜, 어떤 과정으로 벌어지게 되었는지 당일 날 상황을 여러 증인들을 통해 촘촘하게 복기하며 그 경과와 원인을 매우 실감나게 밝혀내고 있다.




이웃 이야기 2- 김웅래 아저씨



김웅래(가명)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간사 직분을 맡고 있던 몇년 전 어느 날, 평소처럼 새벽기도에 나온 팀원들과 교회로비 1층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름하게 차려입은 아저씨, 딱봐도 노숙인 티가 나는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 교회는 서울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노숙인 아저씨들이 새벽예배 마치고 공짜로 주는 아침 밥을 먹으러 자주 오신다. 그런데 직접 이렇게 말을 거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가까이 다가오셔서 뭔가를 부탁하려는 것 같았다. 난 순간 돈이나 좀 쥐어 보내야지 하는 생각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 하는데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저, 외로워 죽겠어요.’


순간, 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가만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뭐라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일단 겁을 먹은 것 같은 팀원들을 먼저 보내고 그 아저씨에게 따뜻한 커피를 사주며 물었다.


‘저...제가...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저기요...저, 외로워 죽겠어요...전 고아인데요...직장도 잘리고 결혼도 못하고...노숙하고 있는데 이렇게 죽어버릴 것만 같아요...'


그리고는 갑자기 날 와락 안았다.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아저씨가 내 품에 안겨서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데, 매몰차게 밀어내기도 애매했다. 몇분쯤 그렇게 안겨서 우는 걸보니 출근시간이 다가왔지만 이 아저씨를 외면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 수많은 경우의 수가 생각났지만 결국 결심을 하고 그 아저씨에게 지금은 출근을 해야하니 이번 주 중에 아무때나 저한테 연락을 주시라고 내 명함을 건네 드렸다.


명함을 건네면서도 이게 과연 잘하는 행동일까 주저했지만 당시에는 어쩔수가 없었다. 명함을 건네면서 그 아저씨 이름이 ‘김웅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며칠 후 정말로 교회 1층에서 다른 청년의 전화를 빌려서 그 아저씨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저씨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매일 새벽마다 아저씨를 만나서 식사를 같이하며 이야기를 들어드렸고,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없는지 알아보았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새벽마다 보이던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연락처도 없고 항상 만나던 장소에도 보이지 않아서 그 아저씨가 뭔가 사정이 있어 떠났다고 생각했다. 서운하고 걱정스런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홀가분한 안도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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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노숙하던 김웅래(가명) 아저씨는 우연히 내 삶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낯선 전화번호로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아보니 김웅래 아저씨였다. 반갑기도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왜 며칠간 보이지 않으셨냐고 물어보았다.


'지금...영등포 교도소에 있어요...'


'네? 왜요?'


사정을 들어보니, 전에 직장이었던 식당에서 다른 직원들 급여인 200만원 정도를 자기가 횡령한게 있었는데 그 식당주인이 이 아저씨를 신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서울역 앞에서 불심검문에 걸려 그날로 영등포 교도소로 이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아저씨를 알게된 뒤부터 내 인생이 파란만장해지는 건가? 이 아저씨의 삶이 파란만장한건가?’ 이런 생각에 참 번거롭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연치곤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당시 내가 있던 사무실이 바로 영등포 교도소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아저씨를 보러 면회를 가게 되었고 이 아저씨가 수감되어 있던 몇 개월 동안 간식비로 얼마간의 돈과 읽을 책을 정기적으로 넣어드리고 계속 면회를 다니게 되었다. 살면서 가게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교도소 면회를 생면부지의 아저씨 때문에 자주 가게될 줄이야...몇개월간의 수감기간을 마치고 이 아저씨가 교도소에서 나오게 된 후 난 어쩔 수 없이 ‘가족 같은 책임감'을 느끼는 아저씨의 보호자겸 친구가 되었다.


일단, 교회 팀원들에게 이 아저씨에 대한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한 후 주일에는 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리고 팀모임도 나오게 되었다. 겨울에 실제 노숙인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원밖에는 수용이 안되는 서울역 근처 ‘노숙인쉼터’에서 자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라 십시일반 돈을 모아 생활비를 드려서 겨울이 지날때까지 ‘고시원’에서 지내시게 했다. 그리고 직장을 구하고 연락할 때 없어서는 안될 ‘휴대폰’도 하나 장만해 드렸다. 팀원들이 뜻을 모아 ‘옷도 선물하는 친구도 있었고’, ‘책이나 생활필수품’을 선물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김웅래 아저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연하게 ‘노숙인’ 분위기를 벗어갔으며 얼굴 표정도 너무 밝아지셨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직장도 알아보고 활기차게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사는 것 같았던 아저씨가 어느날 부터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화연락도 잘 안받고 어느 날은 새벽늦게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다. 그리곤 자꾸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었다. 어디에 쓰실거냐고 물어봐도 제대로 답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겨울이 다가고  4월에 접어들던 어느 날 아저씨는 팀원들이 돈을 모아 드린 고시원비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일단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아저씨에게 꽤 사납게 추궁을 했더니 동료 노숙인들과 술먹고 흥청망청 써버린 것을 고백했다. ‘아...이래서 함부로 이런 분들을 도우면 안되는 것인가?’ 라는 깊은 회의와 배신감에 그날 밤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 아저씨는 물론 나를 믿고 지금까지 후원해준 팀원들에 대한 미안함과 상심도 너무 컸다.


결국 그 아저씨와 만난 지 거의 1년이 다되어가던 날 또 돈을 빌려달라고 전화한 아저씨에게  이제부턴 전화도 하지 마시고 연락을 하지 말라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금까지의 호의가 배신당했다는 배신감과 분노에 그렇게 소리치고 끊었지만 그때만 해도 시간이 좀 지난 후 다시 연락이 닿거나 교회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걸로 마지막이었다. 그 후 한번도 김웅래 아저씨를 교회에서 볼 수 없었고 다시 연락했을 때 전화번호는 이미 말소된 상태였다.


1년을 기다려주고 함께 했던 기간과 신뢰가 있었는데...나는 고작 몇십만원의 돈을 써버렸다고 그렇게 갈데 없는 아저씨를 벼랑 끝으로 밀어버렸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아저씨에게 마지막으로 매몰차게 소리쳤던 그 기억 때문에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그 때를 기억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고작 돈 몇푼 때문에 배신감을 느껴 그 외로운 영혼을 저버리다니…




이웃 이야기 3- '오빠... 내가 겪은 일은 천국에 가서 밖에는 이야기 할 수 없어요'



여자 후배가 있었다. 내가 간사를 할 때 팀원이었고, 팀이 바뀐 후에도 계속 친하게 지낸 여자후배였다. 예술대 출신의 친구였고, 당시 담임목사였던 전병욱 목사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그의 설교를 반복해서 듣고 또 들을 정도로 광팬이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나랑 친한 형과 같이 있을 때 물어 봤다.


‘오빠, 어떻게 하면 담임목사님과 친하게 지낼 수 있어요?’


나와 그 형은 청년들 귀에 잘 들리는 설교를 탁월하게 한다는 면에서는 당시 담임목사였던 전병욱 목사를 존경했지만, 인격적으로 그리 존경할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가까이서 친하게 지내면 도리어 그의 인간적 약점과 허물 때문에 도리어 시험에 들까봐 가급적 유명한 목사님들과는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고 넌지시 말렸다.


그래도 이 후배는 포기하지 않고 선교를 다녀온 뒤 결국 전병욱 목사와 꽤 친해져서 가깝게 지냈다. 그 뒤로는 팀도 달라져서 자주 연락할 기회가 없었는데, 1년 쯤 지나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자기는 교회를 떠날 생각인데 마지막으로  친한 오빠들이랑 식사나 같이하자고.


교회를 너무 사랑하고 교회 친구들도 너무 좋아했던 친구라 교회를 떠난다는 이야기에  많이 놀랐지만, 식사 자리에 나온 그 친구는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봐도 대답을 피하고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냥 개인사정이 있어서 집근처 교회로 옮긴다는 이야기만 했다.


나는 별 생각없이 그 친구가 담임목사와 꽤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나서 이렇게 물어봤다.


‘너...혹시, 담임목사님이랑 무슨 안좋은 일 있었니?’


난 이 질문을  심각한 의미로 물어본 게 아니라 그저  감정적으로 마음 상할 일이 있었겠거니 하는 차원에서 물어본 거였다. 그런데 그때 그 친구의 반응이 너무 뜻밖이었다.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서 우리 앞에서 우는 것이었다... 한참을 운 다음 겨우 감정을 추수려서 이렇게 말했다.


‘오빠...내가 겪은 일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가서 밖에는 이야기 할 수 없어요...’


그리고는 다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나는 이 아이가 겪었을 일이 내가 상상하고 싶지않은 불길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했다. 그 아이와 헤어진 후 그  자리에 함께 했던 형과 나는 저 아이가 겪은 일이 '혹시...' 하며 불길한 상상을 해봤으나 그 무엇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솔직히...더 상세하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 스스로도 우리의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진실을 알게되면 너무 감당이 안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 일은 잊혀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범죄가 드러났다. 처음 한동안은 애정어린 가벼운 접촉인데 성추행으로 과장한 것이라느니, 이단출신의 여자가 꼬셔서 험담을 하는 것이라느니, 여러가지 억측과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교인들 사이에 돌았다. 그후 전병욱 목사가 사정이 있어 안식을 가진다고 했다가 갑자기 사임하였다. 교인들은 너무 충격이 컸지만 책임지고 사건의 실체를 밝혀야 하는 당회와 교회측에서는 교인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보고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새로운 담임목사의 청빙과정도 순탄치 않게 되면서 교회 내부적으로 몇몇 뜻있는 교인들이 사건의 실체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 당회차원에서 분명히 교인들에게 전병욱 목사 성범죄의 실체를 밝힐 것과 13억이 넘는 돈을 교인들과 아무런 상의없이 주게 된  과정의 공개를 요구한 ‘공동요청문’을 67명의 교인 이름으로 교회 게시판에 올렸다.


간사를 오래한 탓도 있고 오지랖이 넓은 탓도 있어서 난 그런 일련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덕분에 전병욱 목사 성범죄 사건의 실체를  다른 교인들보다 먼저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사건실체를 알게 되니 너무 큰 충격이었다. 피해자가 한 두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으며, 성범죄의 수위도 너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상습적이었다. 피해자들 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그 후배의 눈물과 탄식이 기억났고 그 장면은 악몽처럼 나를 따라나녔다.


‘오빠...내가 겪은 일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가서 밖에는 이야기 할 수 없어요...’


다른 나라로 이민가서 연락이 끊어진 그 후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하염없이 눈물흘리며 했던 저 말은 전목사 사건이 공개된 후 내 가슴을 계속 비수처럼 헤집어 놓고 있었다.


게다가 교회에서 ‘한국교회에 덕이 안된다'며 진실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유야무야 덮으려 했던 시간이 길어지자, 어이없게도 가해자인 전병욱 목사는 많은 교인들에게  위로받고 힘내라는 격려를 받는데 비해  정작 피해를 당한 여성들은 이단에서 파송된 무리라거나, 교회를 흔들려고 담임목사를 유혹하고 음해하는 꽃뱀이었다며 오해와 매도 속에 이중 삼중의 상처를 받아야 했다.


많은 교인들이 진실을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은채 무조건 ‘담임목사’의 편을 들었다.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며  담임목사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를 내 후배와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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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목사의 성범죄’를 심층 취재해 피해자와의 통화 녹취록까지 공개한 뉴스타파M의 방송화면.  ‘뉴스타파M 2 회’- ‘최후변론, 누가 당신의 죄를 사했나? 전병욱 목사’



그리고 그 후 3년 동안 나는 전병욱 목사의 면직을 촉구하고 사건의 실체를 알리는 활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한 번도 그런 사회적인 활동을 해보지 않아서 3년 동안의 싸움과 연대, 시위와 활동은 무척 낯설고 피곤하며 힘들었다. 그러나 이런 싸움이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그 후배의 탄식과 눈물을 기억하며 지금까지 왔다. 내가 이런다고 그녀의 아픔이나 피해자들의 아픔이 잊히진 않을지라도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 두려움 속에 비겁하게 진실을 외면했던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건이 드러난지 3년이 넘었지만 전병욱 목사가 소속되어 있으며  치리와 징계의 책임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http://www.gapck.org)의 '평양노회’는 단 한차례도 조사를 나온 적이 없다. 게다가 삼일교회 교인들이 제출한 면직청원과 ‘전병욱 목사 성범죄 기독교 공동대책위’가 요청한 면직요구와 책임자 면담도 거부하고, 심지어 삼일교회에 새로 부임한 송태근 목사와 당회가 평양노회 정기노회 모임 때마다  절차대로 세 번이나 반복해 제출한 '면직청원'도 절차상 하자나, 서류가 없어졌음을 핑계되며 현재까지 면직은 커녕 그 어떤 징계조차 내리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전병욱 목사는 홍대 근처에 ‘홍대새교회’라는 교회를 개척해 자신과 관련된 언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며 당당하게 목회를 하고 있다.


(※ 지난 자료지만 목회자의 성추행, 강간과 관련하여 '기독교 여성 상담소'의 통계를 보면, 98년 7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목회자 관련 성폭력은 108건으로 강간 61건, 성추행 38건, 성희롱을 포함한 기타 사건이 9건이었다. 그중 사법처리와 권징과 관련된 고소율은 단 8%이고, 교단에서 적극적으로 징계와 면직에 나선 사례는  한건도 없었다.)



전병욱시위.jpg

※홍대새교회 앞에서 ‘전병욱 목사 성범죄 기독교 공동대책위’가 기자회견과 시위를 하는




난 그렇게…

이기적인 내 삶의 안위를 위해,

몇푼 안되는 돈 때문에 배신감을 느껴서,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 무서운 진실이 드러날까봐 겁나서…


내 주변에서  아파하고 눈물 흘리던 이웃들의 아픔을 외면해 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들의 아픔을 보듬기엔 너무 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가지 계명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이야기하자, 자기들만이 옳고, 자기들만이 선택받았고, 자기들만이 거룩하다고 믿으며 사랑해야할 이웃들을 베타적으로 '걸러냈던' 율법교사는 마음이 찔렸다. 그렇다면 그 마음의 찔림을 해소하고 자기를 합리화하여 옳게 보이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계명의 ‘이웃의 범위’를 확 줄여 버리면 된다. 그래서 그 율법교사는 이렇게 물어본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10:29]


이 질문은 그 유래와 기원이 참으로 오래된 질문이었다. 창세기에도 이런 비슷한 질문이 나온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창세기 4:9]


그 율법교사는 자신의 박학다식한 지식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웃 사랑’ 계명의 ‘이웃’이 누군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목숨처럼 지켜온 자신들의 종교적 순결과 거룩함을 더럽히고 혼잡스럽게 할 저런 미개한 이방인들과 이교도들까지 사랑하고 친절을 베풀 책임이 생기도록 이웃의 범위를 넓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웃이 누구인지 뻔뻔하게 되물어 본다.

마치 ‘내가 내 이웃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되묻듯이…


이때 예수님은 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대답해 주신다.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누가복음 10:29~37]



이야기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칫하면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대개 강도가 급습한 지역은 2차, 3차 피해를 예상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아무런 조건도, 피해자의 종교도, 성별도, 민족도 따지지 않고  ‘순수한 인간애’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며 그를 치료하고 보호해 주었다.


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아무 조건없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최근 일어난 일에 빗대어 약간 과장해서 비유하면 현재의 개신교인들에게 '강도 만나 피흘리는 피해자'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일단 그는 모슬렘이면 안된다. 또 동성애자여서도 안되며, ‘레이디 가가’ 같은 몹쓸 음악을 들어서도 안된다. 술이나 담배를 해서도 안되며, 지저분한 욕을 해서도 안된다.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하는 방탕한 족속들도 안된다.


‘경계를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기독교인들



나는 내가 외면한 이웃들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편협했고, 내가 얼마나 우리 만의 천국 안에서 갇혀 살았으며, 내가 얼마나 자기 만의 안위를 쫓으며 살아왔는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외면했던 이웃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때의 내 비겁함을 기억하며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내 소득과 교육수준의 범위, 내 주거와 직장생활의 범위, 내 신앙과 교회생활의 범위’ 안에 안락하게 살고 있을 때는  내가 사는 삶의 ‘경계’를 넘어서 살고있는 이웃들의 삶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할 수 있었다. 내가 관심갖고 지켜보지 않는 한 그들의 아픔과 외로움은 내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더욱 더 외면하기 좋았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며 우리에게 주신 복음(Good News)은 ‘모든 계급과 빈부와 경계와 인종과 나라’를 뛰어넘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경계를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귀족과 하인, 자유인과 노예들이 경계를 넘어 ‘복음의 기쁨과 능력’ 가운데 하나님 나라 잔치를 벌였던 초대교회의 놀라운 관용과 사랑의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비슷한 소득 수준과, 비슷한 지적 능력과, 비슷한 이해 관계로 ‘패거리’처럼 뭉쳐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것이 애국이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교를 하고, 모든 사회적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없애자는 ‘차별금지법’을 온 교인을 동원해서 반대하며 ‘동성애자들 따위’의 인권은 보호받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옹졸하고 배타적인 갈등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나는 교회 일에만 관심갖고, 교인들만 사랑하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는 무관심했던 평범하고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내가 외면했던 이웃들로 인해 내 신앙은  점차 변해갔다. '교회울타리 너머'에 있는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앙의 관점이 변한 후에도 내가 관심갖고 있는 이웃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SNS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이웃의 사연을 같이 분개하며 퍼나르거나, 광장에 촛불 하나 들기 위해  나가거나, 얼마 없는 약소한 돈을  후원하거나, 이렇게 글을 쓰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것 밖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이웃의 아픔에 대해, 이 사회의 부조리와 시스템의 모순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될 수록 그 아픔을 당하는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은 더욱 컸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일만 신경쓰거나, 나와 교인들의 삶만 형통하면 내 주변의 이웃들이 어떻게 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았던 과거보다는 훨씬 더 행복하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고, 그들의 문제를 ‘관심’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들의 어깨 위 무거운 짐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있다는 생각에 희미한 미소라도 지을 수 있었다. 내 좁은 마음의 천국 안에서만 살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보람과 연대의 감동이 있었다.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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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와 가족들은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이웃들이다.


최근에는 ‘세월호' 사고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고 있는 유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기억'하는 것과 SNS에서 새로운 소식을 '퍼나르는' 것과 광장에 '나가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한없이 무력하고 슬프게 느껴지지만, 그 보잘 것 없는 동참으로나마 이웃의 아픔에 함께 하려한다. 이 사건의 원인과 실체가 명확히 드러날 때까지 관심을 끊지 않을 것이며, 광장에 나갈 것이며, 기도할 것이며, 300여명이 넘는 피해자들 중 몇명을 정해서  아주 상세하게 내 친동생처럼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그 가족들을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려 한다.

‘이웃 사랑’은 어쩌면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내 이웃이 고통당할 때 묵묵히 그저 옆에서 같이 울어주고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내 이웃은 그 아픔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칠흙같은 아픔과 절망의 시간을 기어이 견뎌내고 희망의 빛을 발견해서 드디어 웃을 수 있을 때 진심으로 같이 웃어주고 기뻐해 준다면, 그것은 그 어떤 후원과 위로보다 값진 ‘이웃 사랑’이 될 것이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로마서 12:15]



※한계레 신문은 세월호 참사 두달을 맞아 세월호 참사에 희생된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얼굴 그림과 부모의 절절한 심경이 담긴 글을 지속적으로 싣고 있다. 얼굴 그림은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그린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이름과 그 사연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획이다. 위의 그림은 자신은 구조받을 수 있었지만 친구들을 구하러 배안으로 들어갔다가 희생당한 단원고 2학년2반 양온유양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심판의 기준

내 안락한 삶의 경계를 넘어 어디선가 고통당해 슬퍼하는 이웃들을 잊지 않고 그들과 같이 울어주고, 그들의 편에서 싸워주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내가 그 아픔을 외면했던 남일당 참사 유족들과 김웅래 아저씨와 내 사랑하는 후배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 기독교는 강자의 편에 서고, 번영하는 자의 편에 서느라, 가장 먼저 돌봐야 할 약하고 가련한 이웃들을 잃어버렸다. 그 이웃들을 되찾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말로 훈수 두는 것을 그치고(제발!), 그저 아파하는 이웃과 함께할 수 있는 현장으로 가서 묵묵히 같이 있어주면 될 것이다. 그가 가장 힘들어할 때부터 스스로 회복하여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그 곁을 묵묵히 지켜주고 그들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면 된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심판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른 어떤 기준도 언급하지 않고 오직 하나의 기준만 언급하셨다. 바로 우리 주변에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웃(너희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했는지를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말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편협하고 교조적인 신앙으로 자신들이 사랑해야 할 이웃들을  잃어버린 이 땅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되새겨야 할 말씀이 아닐까?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마태복음 25:41~46]




<2014년 10월 24일-웹진 광장.청춘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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