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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끄적끄적, 쓱쓱 (30)
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요즘 독서모임에서 재미나게 읽고있는 책이 유시민씨의 ‘국가란 무엇인가’(개정신판)이다. 국가에 대한 여러 역사적, 정치적, 철학적 개념들을 차근 차근 짚어주면서 친절하게 설명하는 이 책은 다양한 생각할거리와 토론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독서모임’을 하는 분들에게 추천할만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정치성향에 대한 아래 이야기는 깊이 공감이 갔다.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며 상당한 정신적 노력을 요구한다. 변화된 환경이 무엇인지, 나의 정신적 태도가 어떠한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기존의 사유습성을 바꾸는 데 대한 본능적인 저항감을 극복하려면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한다. 지배적 생활양식에 순종하면서 일상적 생존 투쟁을 견뎌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예전엔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 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꿈을 쫓아 살 용기가 없으니 그저 현실 타협의 비겁한 변명으로 들렸는데, 나이가 드니 이제는 그말이 좀 다르게 들린다.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거다. 인생 뭐 별것있나?...남들도 다 그렇게 힘들게 꾸역 꾸역 살아간다는 말이...이제는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라는 생각과 이어지면서 내가 겪는 고통과 쓸쓸함, 삶의 무게는 어쩌면 그리 특별한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나랑 비슷한 처지의 비슷한 고통과 비슷한 무게감으로 오늘 하루 꾸역 꾸역 살아가겠지...그런 생각이 드니 버틸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꿈을 쫓아 위대한 성취를 이뤄낸 사람도 참 대단하게 보이지만, 별 볼일 없는 인생에서 하루 하루 충실하게 ..
인생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을 걸어가는 여정이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그 모든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싶어한다. 불안해하지 않고 꽃길만 가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정말 모든 불안의 요소들, 잠재적 위험을 없애는 것이 가능한지는 차치하고라도 그런 요소들을 모두 없앴을 때 인간은 정말 행복할까? 난 그렇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불안과 위험이 없는 지루한 인생길에서 인간은 성장하고 배우기보다 퇴행하고 타락한다. 성경을 보면 우상숭배가 발흥하는 심리적 시작점은 '네가 이 신에게 헌신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와 불안이 해결될 수 있다'는 메세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 모든 불안과 위험을 제거하기보다 한걸음 내 딛을 수 있는 정도의 증거를 보여주시며 계속해서 인생의..
2015년 사우스캐롤라이나 흑인교회 총기 난사로 9명이 사망한 비극적인 사건 직후, 범인이 잡히고 얼마 안있어 피해자 가족들이 범인을 용서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당시 그 기사나 영상을 공유하면서 매우 들뜬 뉘앙스로 '내가 크리스천인게 자랑스럽다'는 식의 포스트가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넘쳐 흘렀다. 나는 기독교인들의 그런 포스트를 보면서 감동하기보다 기분이 매우 안좋았는데... 그 가족들의 용서가 숭고한 것이며, 기독교인으로의 위대한 결단이라고 추겨세우는 저들은... 유가족의 마음을 만분지일이라도 이해는 하는 걸까? 자기가 생각하는 숭고한 기독교적 가치가 극적으로 성취되는 걸 보며 대리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으나, 유가족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 같은 느낌은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당위에 빠져 비극에..
누구에게나 인생살이는 만만치 않다. 살다보면 너무도 힘든 시간을 지나야 할 때도 많고, 나쁜 일이 올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나쁜 일들도 몰려서 오기도 한다. 이런 순간을 여러차례 겪어오면서 힘든 시간들을 견디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는데...대단한 건 아니지만 나름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사람은 힘든 일을 겪을 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라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딱히 이유를 알 수 없을땐 결국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나도 안좋은 일을 겪을 때 답을 얻을 수 없는 '왜 하필 나에게?'라는 질문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후회' 속을 번갈아 헤매며 시간만 낭비하고 더 깊은 좌절과 우울의 수렁 속에 빠지곤 했다. 그렇게 진창 속을 헤매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을 수습하기 시작하면서..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인내하라. 질문 그 자체를 사랑하라. 답을 구하지 말라. 그것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핵심은 모든 것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질문들을 살아라. 그러면 서서히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먼 훗날 그 답을 살고 있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언젠가 책에서 읽은 문장인데 온통 제 마음을 사로잡은 명문이었습니다. 효율과 성과 중심의 정보화 시대가 되다보니, 우리는 매사에 너무 빨리 '정답'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충분히 찾아보지 않고 '정답'을 찾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 좋기만 한 것일까요?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서, 너무 빨리, 너무 이른 나이에 말과 머리로 '정답'을 자신과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들을 저는 신..
누구에게나 비슷한 이야기겠지만, 내가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내 마음과 삶의 형편은 낮은 곳에 있었다. 얼핏 지나가는 친구의 위로든, 깊이 공감되는 책속의 문장이든, 꽃을 닮은 신기한 곤충의 모양이든... 신의 실존이 느껴지는 흔적은 모호한 위로와 증거들을 통해 묘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래 내가...이런 개떡같은 삶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어떻게든 살아야할 이유가 있단 말이지?' 천지를 만드신 신이 있는데...이렇게 낮은 곳에 있는, 못나고 성격나쁜 인간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종종 기억난다. 그런데, 신앙을 갖게 된후 내가 좀 살만해지자, '정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표를 갖고만 있다면 무엇을 요구하든 그걸 다 들어주시는 하나..
얼마전 BBC에서 '고양이의 은밀한 사생활'이라는 다큐를 봤다. 고양이 키우는 입장에서 넘 공감하며 재밌게 봤는데, 고양이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독특한 동물인지 잘 보여준 다큐였다. 고양이는 차갑고 이기적이며 인간과의 교감에 관심이 없는 동물이라고 많이 오해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인간과 깊이 교감할 뿐 아니라 연약하고 병든 인간이나 동물의 친구나 치료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자폐 때문에 언어장애가 있는 아이 곁에 있어주며 그의 말문을 트이게 하고, 날때부터 눈이 먼 늙은 개의 친구가 되어서 그 개가 다른 사물에 부딪치지 않도록 인도해주기도 하는 내용이 다큐에 나왔다. 자폐아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난 종교가 없지만 신을 믿는다면 신이 제 아이에게 이 고양이를 선물로 보내주셨다고 믿을거에요' 탁월한 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가 누적된 시간이 10년이라면 회복되는데 걸리는 시간도 그쯤 걸린다고 봐야한다. 건강을 잃어버린 잘못된 습관이 10년째 누적되어 있다면 그 건강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올바른 습관도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간사하고 어리석어서 문제가 누적된 기간만큼 회복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아까와하고 주저한다. 그리고 성격 급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괜히 신을 원망한다. 기꺼이 '돌이키는 시간'을 주저하고 뒤로 미루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시간만 낭비하고 결국은 망가져간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의 대가를 치르는 걸 보곤 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서의 겸손함이란 실패와 후회의 순간 나타난다.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해도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고 회복을 위해 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보이는 인간의 조언이나 말을 통해 알려고 할 수록 우리안에 내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듣는 능력은 점점 더 둔감해진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실존의 감각을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신앙의 감각으로 이겨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아무도 없는 자기만의 광야에서 홀로 있는 시간이 정기적으로 필요한지 모른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감을 통해 내 연약한 욕망을 시험받지 않는 곳에서 홀로있는 시간을 가질 때 우린 성령의 음성에 예민해 질 수 있다. 그런 고요의 시간에 우리는 비로소 현대의 기독교인이 잃어버린 '자족(Satisfaction)의 가치'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돈의 가치(또는 사역의 가치)로 환산되고 아무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