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하나님은 당신 편이 아닐수도 있다 본문

기고글-ㅍㅍㅅㅅ, 뉴스앤조이

하나님은 당신 편이 아닐수도 있다

에쎌디 2018. 2. 9. 10:46

한국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의 온갖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범죄와 기독교 신앙이 어쩜 그렇게 '찰떡 궁합의 케미'를 보여줄 수 있는지 내게는 항상 일관된 관심과 분석의 대상이다. 너무나 여러가지 이유가 있고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그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아전인수적 신앙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가사나 시중에 나와있는 QT교재를 봐도 대부분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한국교회 비리나 사건, 사고를 보도하는 참담한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이나 공유하는 글들 중에 이런 패턴의 고백도 자주 보인다.

'이런 어두운 시대에 저는 주만 바라봅니다.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안타까운 현실 속에 참담한 심정으로 주님만 의지하겠다는 고백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물의를 일으키고 범죄한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세습을 하고, 성범죄를 일으키고, 권력을 남용하며 온갖 비윤리적인 행태를 해도 '하나님은 날 사랑하시고 내편'이라는 잘못된 자기확신과 신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지나치게 믿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에 대한 해결책 또한 '주님만 바라보는 나'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합동교단에서 온갖 정치적 패권을 행사하며 전병욱을 집요하게 비호했던 악명높은 정치목사 한명은 놀랍게도 기도원에 엄청나게 자주 가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자주 갔던게 아니라 요즘도 틈만나면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란다. 그가 하는 짓은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부터 온갖 못된 짓으로 악명이 높은데 말이다.

하나님은 당신 편이 아닐수도 있다.

나는 한국교회의 삐뚤어진 신앙관의 중심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편'이라는 믿음의 중심에 '이웃'이 들어설 공간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이웃을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삶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순수한 객체(타자)'로서 '전도대상자'들을 이웃이라고 착각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단기선교, 해외선교 열심히 가서 그 전도대상자들을 위해 눈물을 펑펑 울어도 내 직장동료가 성추행을 당해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건 얼마든지 차갑게 외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은 내 삶의 안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의 '순수한 객체'들로만 존재하니까. 내 삶을 피곤하게 하고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직장동료나 후배는 '전도대상자'도 아닐뿐더러 번거로운 존재인 것이다.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을 당해서 아파하며 고군분투할때 그 주변의 동기, 선후배들 중에 기독교인이 한명도 없었을까? 아니, 엄청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침묵하고 방관했다. 그들도 교회에서는 '전도대상자'들을 놓고 기도하며 울었을지 모른다.

이웃없는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 그 중심에는 왜곡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편이 아닐수도 있다.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한답시고 '주님만 바라보는'데서 그치지 말라는 이야기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묻는 유대인과 제자들에게 강도당해 죽어가는 이를 끝까지 도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누가복음서‬ ‭10:36-37‬ -


스페인화가 Josep Tapiró Baró 의 선한 사마리아인


재밌게도 죽어가는 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친 두명은 그 시대 가장 경건하고 직업적인 종교인이었던 '제사장'과 '레위인'이었다. 이 비유가 지금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가장 사랑과 자비가 넘쳐야 할 전문 종교인들은 죽어가는 이를 버려두고 지나갔지만 당시 가장 저주받고 불경건한 혼혈이라 비난받던 사마리아인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다.

교회가 혼란하고 교회에 불의가 판을 친다고 생각한다면 '주님만 바라보는' 도피처로 갈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결국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 관심갖고 사랑하는 것이란 걸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고통받는 이웃의 편이라고 성경에서 그렇게 줄기차게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은 내편’이라며 이웃을 버려두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눈은 고통받고 죽어가는 당신의 이웃에게 향해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우리도 봐야하지 않을까? 주님만 바라본다고 고백하면서 자기 주변의 강도 만나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한다면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 레위인과 똑같은 인물이 된다.

우리 개신교인들이 자기 주변의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얼마나 매정한 존재인지 세월호 참사는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배때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 라고 고백하고 찬양하며 지금도 눈물흘릴거라 생각하니 참으로 역겹고 참담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호통치셨을 것 같다.

'구역질나니까 나만 바라보지 말라고!' <페이스북에 썼던 글, 뉴스앤조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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