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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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

에쎌디 2017. 12. 4. 07:30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 보다 신앙적 성향의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난 개인적으로 신앙인들이 ‘하나님이 이렇게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말하는 화법을 정말 싫어한다. 그것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이든, 누군가를 기도해주다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든 그런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 아니 신뢰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경계한다. 이건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글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니 논쟁은 사양한다. 내가 왜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쓴 글이랄까.


내가 왜 그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을 싫어할까...곰곰히 생각해보면 여러가지 경험과 사례가 있었다. 주변에 그렇게 말하는 개신교인들 중에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드물기도 했고, 그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과 권력을 행사할때 ‘하나님’을 핑계로 대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완전히 정신적인 불안정함과 건강을 잃은 경우로 가슴 아프지만 어머니가 대표적으로 그런 경우다. 어머니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하면 난 지금쯤 100억 부자가 되어있거나 결혼도 10번은 넘게 했을거다. (응? ㅡ.ㅡ;)  조현병 환자에게 ‘환청’은 그리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환청 뿐 아니라 환시를 보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신앙적으로 신비한 체험을 전혀 못해본 건조한 신앙의 소유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신앙을 처음 가졌을 때 뿐 아니라 인생의 여러 굴곡진 지점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기엔 확률적으로 매우 드문...그러니까 흔히 신앙인들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라고 할 만한 일들을 적지 않게 체험하고 겪었다. 어떤 일은 분명 ‘기적’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도 있었다.


나는 주변의 친한 지인들이나 후배들에게 그런 일들을 간증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후 그런 일들을 간증하거나 공개적으로 밝히는 걸 피하고 있다.


그건 내 신앙의 컬러가 좀 변했기 때문이다. 좀 더 신중해졌고, 좀 더 회의적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의심과 회의가 많아졌고, 좋게 말하면 내 신앙적 체험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아무리 객관화가 가능한 신학적 담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개인의 초월적 체험’이라는 영역이 있다. 누가 뭐래도 내가 그렇게 느꼈고, 들렸고, 봤다면 그건 ‘믿음’의 영역으로 내가 스스로 납득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면이다. 내가 봤다는데, 내가 들었다는데 그걸 제3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물론 그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정말 성령의 역사나 하나님의 음성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분별이 필요하겠지만.


나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 냉정하게 돌아보자 ‘하나님이 나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생각해서 행동했던 것들중에 들어맞지 않았던 것들도 꽤 많았다. 물론 그건 하나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순종과 응답’이 부족했기 때문에 들어맞지 않았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내 욕망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포장해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둘 중 어느것이 맞는지 나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내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틀릴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pixabay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인들 중에 QT말씀을 묵상한 후, 또는 기도를 한 후, 또는 어떤 ‘느낌과 직관’이 와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공공연하게 사람들앞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부럽기도 하고 경계심이 생기기도 한다. 나한테는 한번도 그렇게 선명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저분들은 얼마나 ‘영빨’이 쎄길래(?) 저토록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걸까?...하는 부러움과 또 한편에는 저렇게 분명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했다가 틀리면 어쩌려고 저러나...하는 경계심과 걱정도 있다. 물론 대체로 그렇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선언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경험치’가 있긴 하다. 많은 경험치가 축적되서 ‘이런 느낌’이면 거의 하나님의 음성이 맞았어...라는 추론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나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여러가지 수단과 방편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걸 믿는다. 대표적인 두가지 통로가 ‘성경’과 ‘기도’라는 것도 인정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특정한 영적 체험과 느낌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라고 스스로에게 주장하거나 믿는건 당연한 것이고 경계할 일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종교적 체험과 신앙의 영역을 넘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까지 ‘분명하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많이 신중하거나 절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그 사람을 우상화하며 의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선의와 건전한 신앙관과는 상관없이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변질되기 쉬운 것이다. 조용기 목사가 한참 이름을 날릴 때 정말 어마 무시한 기적들을 행했다고 한다. 나도 여러 책들을 통해 그런 기적과 사례들을 알고 있다. 그 모든 사례와 기적이 전부 지어낸 것이거나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히 신기한 기적같은 일들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끝은 어떠한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하나님이 내 앞날에 대해서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아주 선명하게’가르쳐 주시는 게 싫다. 그냥 흐릿하고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하게 인도하시는 지금이 훨씬 좋다. 게다가 나한테 직접 말할 수 있는 분이 소위 '영빨'있는 사람 통해 돌려 말하신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진짜 더 나쁘다. 하나님 그냥 나한테 직접 말하세요~ ㅋ 


시시콜콜하게 내가 뭘 해야 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쟤가 어떻게 될지 알려주는 하나님은 왠지 나나  쟤의 자유의지와 지성을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뭘해야 하고 어떻게 될지 굳이 그렇게 자세하게 알려주시는 이유가 뭔가? 쉽게 말하면 ‘못미더워서’가 아닐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나를 인도하신다면 시시콜콜 다 가르쳐 주지 않고 신뢰함으로 앞날이 불투명한 안개같은 인생을 ‘스스로’ 걸어가도록 인도하지 않으실까?


나는 신비한 신앙의 체험도 많지만, 기도한 대로 응답받지 못한 경험 또한 엄청나게 많다. 오죽하면 ‘응답받지 못한 기도의 위로’라는 장문의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내가 체험한 하나님은 응답하기보다 침묵하고, 구체적으로 알려주기보다 불투명한 앞날을 그대로 견디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이었다. 그래서 불만이 좀 많긴 하다. 하지만 그렇게 응답도 없고 불투명한 앞날을 걸어가도 묵묵부답인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부르짖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은 별로 안들었다. 이건 참 역설적인 이야긴데...내 기도에 그토록 응답없는 무정한 하나님과 오랜 기간 동행하다보니...내 기도를 들어주지는 않지만 뭔가 건지는 것 하나는 있더라. 성격이 고약한건지, 정말 이해가 안될정도로 묵묵부답인 그 분이 내 곁에 같이 걸어가는 것 느낌은 들더라는 거지. 내 앞길을 선명하게 가르쳐 주지도 않고, 뭔가 섬세하고 시시콜콜한 지침을 내리는 것도 아니고, 입도 한없이 무거운 그분의 임재가 ‘기도와 투정과 부르짖음’가운데 느껴질 때가 많았다. 툴툴대는 사고뭉치인 내 곁에서 한없이 입이 무거운 그분이 잠잠히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 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물론 이것 또한 객관적 사실이 아닌 내 느낌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선명하게 알려주는 신’보다 ‘모호하게 함께 있는 신’이 훨씬 매력적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하나님, 앞으로도 나에게 너무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알려주지 마세요. 내 인생 내가 어떻게든 해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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