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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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노동-생생하게 기록된 차별의 민낯

에쎌디 2017. 11. 19. 19:15

페미니즘과 양성평등, 여성혐오,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언제부터인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성이 받는 차별에 대해 조금이나마 눈을 뜨게 된 계기가 교회에서 벌어진 성범죄 사건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부터였습니다. 한국 교회(아마 한국 사회라고 해도 별 차이가 없겠지만)의 뿌리깊은 여성혐오와 편견의 문화가 어떻게 교회 내에서 성범죄 피해자가 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덮고 있는지 그 두터운 편견과 혐오의 시스템을 직접 겪어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관해 올해 9월에는 뉴스앤조이에 특별기고를 하기도 했었죠.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한국교회의 무지와 편견'이라는 글이 그 글입니다.


저는 남성이라 여성이 겪는 차별과 고충에 대해 잘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들이 겪는 피해와 부당한 차별의 실체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고, 그 이후에 여러 언론과 책들, 여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그들이 이 사회에서 살면서 겪는 '항시적 차별과 폭력의 위험'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재밌는 건 사회보다 더 심각한 차별과 혐오와 무시가 자행되고 있는 교회에서는 이런 여성들의 고충과 불이익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실상 여성들의 헌신과 노동력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성들의 헌신에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여성들이 교회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직분은 고사하고 여성들이 목사가 되는 것조차 '비성경적'이라는 주장하에 묵살되고 있는 교단도 많습니다. 장로교계열에서 여성들이 교회 내 직분에서 가장 명예직으로 여겨지는 '권사'직분을 가지고 있어도 그들은 당회의 의사결정에 일절 참여하거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페미니즘에 대한 다양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고,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은 좋은 책들도 많이 출간되고 있지만 여성들이 받는 차별의 실체가 얼마나 열악하고 끔직한지 알 수 있는 한 권을 추천하라면 제가 오늘 소개할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페미니즘 담론이 좀 어렵고 이론적일 수 있으나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의 담담한 수기들은 '내가 정말 이런 사회에서 살고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적인 사례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너무도 미개하고 야만적이어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적나라한 우리 사회 차별의 민낯을 이 책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2003년 서울에서 시작한 여성노동자 글쓰기 모임에서 추려진 글들을 모아 원고로 낸 책입니다. 최초의 모임동기는 글을 쓰고 싶어하고, 여자로 사는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는 모임에서 여성노동자가 직접 글을 쓰고 기록하자는 취지에서 소박하게 시작한 모임이라고 합니다. 김시형, 김은선, 김향수, 류현영, 리온소연, 문세경, 변정윤, 안미선, 윤춘신, 은아, 이지홍, 최성미, 희정 이렇게 13명의 저자들의 글을 모아 5개의 장으로 글을 엮었습니다.

1장은 행사도우미, 센터의 운동강사, 야쿠르트 판매원등 일상 속에서 마주친 여성들의 일이야기를 다뤘고, 2장은 새로운 일자리로 등장했으나 최소한의 고용보장도 받지못한채 여성이 대부분 전담하게 된 돌봄노동의 실태를 파헤쳤습니다. 3장은 여성노동자글쓰기 모임 회원들이 자신의 노동이야기를 직접 수기형태로 들려줍니다.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인 하청공창 지하창고에서 일한 이야기부터 장애여성으로 겪은 일터의 경험까지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줍니다. 4장은 소수자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일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비혼모, 여성 이주노동자, 시각장애인 안마사등이 겪은 노동현실의 참담한 실체를 보여주며 말합니다. 5장은 여성들의 노동권 보장을 위해 직접 싸우는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호텔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차별에 시달리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싸우고 해고된 여성, 자신들의 하는 일을 무시당하고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급식조리원, 방송국 보조출연자, 조선소에서 일하는 하청 여성노동자들의 눈물겨운 분투기가 그려집니다.



이 책의 장점은 다양한 사람들의 생생한 체험담과 수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꼭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데요. 저는 이 책을 읽다가 몇 번이고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깊은 한숨을 쉴 때가 많았습니다. 어떨 때는 계속해서 책을 읽는게 힘들어서 한 동안 이 책을 읽지 않고 서재에 꽂아둔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한 권을 다 읽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한참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많은 여성들이 이런 척박하고 야만적인 환경을 날마다  매순간 느끼고 직면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너무나 몰랐던 제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서설이 길었습니다. 책의 생생한 에피소드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저는 요, 얼굴에 침 뱉는 것도 한 번 당했는데, 더럽고. 아이고, 냄새나고. 지금도 생각하면......, 그 고객이(요금소를 지나칠 때마다)욕을 하고 다닌 게 3년인간 4년인가 됐어요. 그날도 밤에 일하다가 욕을 먹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이제 (욕)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그만하세요, 그랬더니 침을 딱 뱉는 거에요. '야, 너!'이러면서......,"

경찰에 신고했지만 증인이 있어야 된다고 했다. 밤에 혼자 일하는데 증인이 있을 리 없다. 경찰은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녹취해서 신고하라고 했다. 


욕하는 건 남자들이 더 심하고 많은 편이지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행해지는 일이다.

"야간근무 때는 새벽5시 정도 되면 너무 졸려요. 그런데 말이 나오겠어요? 졸릴 땐 목소리가 땅속으로 들어가려고 해요. 그런데 고객이 와서 하는 말이 '인사 안 해요?' 그래요. 집에서 인사 좀 받고 나오든지요."


[기록되지 않은 노동] 1장 -'욕설은 기본', 톨게이트 여성노동자의 호소-중에서



'혜진이 일터에서 경험한 일은 수진은 이제 동네에서도 겪고 있다. 미혼모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면 지역 동네의 태도도 적대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제가 미혼모인 걸 동네에서 알고 나니 동네 아저씨들이 저를 보면 이제 이래요. '애기 엄마, 하룻밤 재워줄 수 있어?', 오늘가면 저녁 먹여주나?' 되게 기분 나쁘죠. 동네 아줌마가 넌지시 와서 나한테 노래방 도우미나 그런 일 해보라고 소개시켜준다고까지 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요즘 세상 좋아져서, 복지 혜택 좋아져서 혼자 애 키우기 쉽지?' 근데 솔직히 우리는 돈도 벌고 살림도 하고 육아도 해야 하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경제적으로 해결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일반 사람들하고 싸우면 싸움의 끝이 뭔지 아세요? 저 그런 얘기 몇 번 들었어요. '야! 니가 지금 내가 낸 세금으로 먹고살고 있어!' 그 말을 들으면 왜 할 말이 없어지는지.....,그 순간에 화도 안나고 뭔가 쾅 맞은 거 같고 땅에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들어요."

수진은 싫다. 이런 심정이, 이런 상황이,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기록되지 않은 노동] 4장 -'비혼모에게 일할 권리가 있습니까?-중에서


이 책의 제목이 '기록되지 않은 노동'이지만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고 해도 잘 어울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엮어낸 기록노동자 안미선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여자들이 있다. 그녀가 '일을 한다'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일을 해왔으므로 당연히 있는 모습으로 여겨진다. 그 일은 '노동'이라는 공식적인 이름으로 잘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생존을 위해 일하고, 노동을 통해 세상과 만나며, 차별과 맞서고 있다. 그 얼굴을 마주하면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노동과 노동 아닌 것의 구분이 얼마나 인위적이며, 삶에서 그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한 사람이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해 일을 해내는지 알게 된다.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지만 이 세상의 한 편에서 언제나 벌어지고있는 참담한 차별과 야만의 현실을 이 책은 담담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그녀들의 기록되지 않은 노동, 보이지 않는 노동과 고충의 충격적인 현실을 보게되는 순간, 더 이상 힘주어 페미니즘이 왜 이 세상에 필요한지 설득할 필요조차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의 당사자들이 겪은 일들이 내 아내, 내 누이, 내 어머니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이라고 생각한다면...이 세상의 차별과 야만을 줄이려는 우리들의 노력과 관심은 한층 더 높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저는 그들이 겪어야 할 차별과 부당한 현실을 너무 늦게 알게되었다는게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출간을 소개했던 기사를 링크합니다. 아쉽게도 많은 좋은 책들의 운명이 그러하듯 이 책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져갔는데요. 많은 분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누이, 아내, 어머니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요.


'보이지 않는 노동'을 기록했습니다. [한겨례 2016년 2월5일 기사]

산모도우미·간병인·염색노동자…13명 ‘비정규직 여성’이 말한다 ‘숨은노동’ 요구하는 이 사회 민낯

'기록되지 않은 노동]

김시형 외 12명 지음/삶창·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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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노동 - 10점
여성노동자 글쓰기 모임 지음/삶창(삶이보이는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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