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원의 삐딱한 신앙이야기

정의가 필요할 때 긍휼을, 긍휼이 필요할 때 정의를 들이대는 신앙 본문

끄적끄적, 쓱쓱

정의가 필요할 때 긍휼을, 긍휼이 필요할 때 정의를 들이대는 신앙

에쎌디 2017. 12. 13. 14:12

※ 2011년 12월에 페이스북에 쓴 글입니다. 당시 한참 나꼼수 팟캐스트 방송 열풍이 불때였죠. 마침 김동호 목사님이 나꼼수 방송을 3분 정도 듣고 비판의 말을 페북에 쓴 것이 뜨겁게 화제가 되었던 때의 글입니다.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만이 신앙적가치라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요. 십자가의 의미가 과연 그런 의미일까요? 사랑과 공의, 용서의 의미를 깊이 분석해본 글입니다.

무조건 덮어주는 것이 사랑인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린, 모두 헛점 많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이성과 논리로서만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 임하는 신비한  ‘회개(회심)의 체험’ 때문이다. ‘회심의 체험’은 그 양상과 구체적인 모습이 다 다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될때, 자신의 모든 연약함과 불의한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며 근본적으로 죄악된 자아에 대한 각성과 함께 견고했던 자아가 붕괴되며, 자아의 붕괴와 동시에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깨닫게 되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린 그런 회개의 체험을 통해 지식적으로만 알고있던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얼마나 큰 희생과 자비의 대가인지  깊이 깨닫게 되며 머리로 이해하던 신앙이 비로소 뜨거운 심장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처음 이런 깊은 회개를 체험한 순간을 잊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어떤 분들은 이런 극적이고 강렬한 회개가 아닌 잔잔하고 점진적인 회개의 과정을 통해 거듭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용서’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 하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관에   ‘정의’는 점차 사라지고  ‘긍휼(불쌍히 여김)과 용서’만이 전부인 것처럼 오해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무조건 덮어주는 용서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걸까?

용서와 사랑과 정의가 올바른 관계, 바른 위치에 있지 않으면 가장 거룩하고 숭고한 하나님의 사랑과 뜻이 가장 몰상식하고 부도덕한 패륜적 윤리로 둔갑한다.

그래서 사회적 불의 앞에 침묵하고 긍휼의 자세로만 대하는게 마치 전부 옳은 것인 냥 생각할 위험성도 있어 보인다. 나의 글은 그런 위험성을 경계하는 목적에서 쓰여진 글이다.


우리가  그런 깊은 거듭남과 자아가 깨어짐의 체험이후, 우리는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는 소명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며,

소명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정의가 필요할 때 긍휼을 들이대고, 긍휼이 필요할 때 정의의 잣대로 사람을 재단하기

우리는 '죄'로 훼손된 이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될때,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공의의 눈이 생기게 되며, 공의로운 분노의 마음을 갖게 된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나의 이익이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에 엄청난 분노와 불만을 터뜨렸다면, 거듭난 후에는 '나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기준에 입각한 '불의'에 대한 각성의 눈이 생기게 된다. 나의 이익때문에 분노하거나 비난하는게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가 '하나님의 진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나왔는가에 대한 각성으로 '분노'가 생기게 된다.


문제는 이 두가지 '분노'를 대다수의 목회자들과 크리스쳔들이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의가 필요할 때 긍휼을 들이대고, 긍휼의 돌봄이 필요할 때 정의의 잣대로 사람을 재단”한다.


성경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것들. 예를 들면~생활의 불편, 먹는 것의 불편으로 원망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셨지만, 비느하스가 공의의 분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단 행음과 우상숭배에 분연히 일어났을 때는 비느하스의 분노로 말미암아 도리어 이스라엘 전체에 내려졌던 죽음의 저주가 중단되기도 했다!


크리스쳔은 분노하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상위질서(?)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순종 만하는 존재는 더더욱 아니다.


무엇을 위해 분노하는가? 무엇을 보고 순종하는가?

누구를 따르는가?...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섬세하게 분별하는 존재들이다.




성경말씀과 기도와 치열한 지성의 씨름 끝에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는 크리스쳔들이 건강한 크리스쳔들이다. 인간이 지,정,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은 그 3가지 속성을 최대한 다 활용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라는 뜻이 아닐까?


내가 우려하고 경계하는 것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가치의 기준으로 분별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 너무나 단순하고 순진하게 성경의 원리를 들이미는 신앙적 태도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목회자들과 신앙리더들이 생각하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속한 세상의 사건들을 바라보고 너무 쉽게 판단해서 말해버린다!

이것은 태만이고, 게으름이고, 무지이지~결코 거룩한 영적가치를 선포하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존경하던 김동호 목사님 조차 ‘나꼼수’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3분’정도 들으시고 쉽게 판단해서 글을 남기셨다! 그분의 가치 판단이 옳고 그른 것은 둘째 치고라도, 나꼼수가 한회방송만 1시간반에서 3시간에 육박하는데 그걸 3분만 듣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여의도나꼼수 콘서트에 12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운집할 정도로 세상사람들이 나꼼수에 열광하는 이유를 정말로 알고 싶다면, 적어도 3~4회는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성령충만함으로 영적지도자가 되면 1분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사람의 영적상태와 지금의 문제가 무엇인지 다 알 수 있다고 믿는 지도자들 정말 많다! 그리곤 이야기하겠지, 자신은 사역때문에 너무 바빠서 그런 ‘세상적인’걸 일일이 신경쓰고 들을 시간이 없다고...



공의로 판단할 때와 긍휼로 판단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가치로 판단해야 할 때와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의 가치로 판단해야 할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크리스쳔들이 너무나 많고, 목회자들조차 세상에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촛불시위’같은 데모를 하는 것은 무조건 나쁘고, 누군가를 비방하는 것은 무조건 영성을 갉아먹는 짓이라고 너무나 쉽게 말해버린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대할 때는 ‘자비와 긍휼’의 가치로 자신의 랍비로서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하셨으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예루살렘 상인연합, 헤롯, 로마까지 한통속이 되어 예루살렘 성전안을 부패와 비리의 온상으로 만들어버린 성전을 대하실 때는 단호하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공의의 진리’의 가치로 뒤집어 엎어버리셨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한번도 화를 낸적이 없었는가? 복음서를 조금만 읽어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전투적으로 그 당시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위선적 종교지도자들과 싸워왔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독사새끼들아!’라고 누가 말했는가? 예수님이 복음서 어디에서 ‘상위질서의 허물을 입에 담지도 말라고 하셨던가?’ 예수님은 상위질서의 허물을 입에 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 수익원으로 추정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안 시장통을 다 뒤집어 엎어버리셨다! 욕쟁이 예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괜히 이런 제목의 책이 나온게 아니...


예수님은 건강한 신앙인이셨다!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할 가장 완벽한 크리스쳔의 모델이다!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의 가치로 판단해야 할 때와,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의 가치로 판단해야 할 때를 명확하게 아셨다! 아마도 내 생각엔 그 기준은 ‘죄’를 범한 인간의 ‘의도성’과 ‘기만성’이 기준이 아니었을 까 싶다~~그리고 개인적 범죄와 집단이 연루되어 있는 조직적 범죄의 차이도 있을 수 있다. 한명이 범죄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에 긍휼의 가치를 부여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두세사람 이상이 동일한 사악한 목적과 탐욕의 정신으로 묶여진 집단의 경우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기 그지없는 태도와 그들을 책망하셨고, 저주하셨으며 싸우셨다!







이 시대 많은 목회자들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성도들을 생각할 줄 모르는 신앙인으로 키우고 있다! 한국에 세계최대의 교회도 있고, 많은 크리스챤 성도수를 자랑하면서도 왜 세계에 내놓을만한 뛰어난 크리스챤 사상가는 한명도 없을까? (난 무조건적, 맹목적 순종을 강요하고, 세상에 관심을 끊는 것이 마치 진정한 영성의 척도인냥 가르치는 목회자들의 이면에 ‘AW토져’의 영향이 베어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난 그 이유가 아주 아이러니하게도 ‘칼빈이즘’에 기초한 ‘맹목적 순종’을 권면하는 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정작 칼빈은 그당시 부패하기 그지없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폭압속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떤 것이 더 성경적인 것인지 치열하게 사색했고, 철학했으며, 교리를 만들어 나갔다! (근데 성경에 대한 묵상과 지식을 강조한 ‘칼빈’은 ‘맹목적 순종’하고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데...역사는 때로 아이러니로 가득차 있다)


칼빈은 타락한 로마가톨릭 교회가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의도적으로 알지 못하게 ‘라틴어 성경’으로 성경을 읽고,성도들이 알아들을 수없는 ‘라틴어’로 설교를 하며 ‘정보의 비대칭성’을 극대화하여 결국 자신들의 전횡과 부패와 권력독점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게 하려하는 것을 잘 알았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도와 제상들의 갈등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권력은 정보에서 나온다.이도는 누구나 배울 수 있는 한글창제로 권력을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려했다.)


한쪽은 성경을 너무 잘알아서 그것의 뜻을 마음대로 왜곡하여 자신의 이익과 권력욕을 합리화하는 해석으로 일관했고(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 무지한 백성들은 그저 종교지도자들과 교회의 말이 옳겠거니 생각하고 무지하게 굴복하며 순종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마틴루터와 칼빈은 이러한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와 시스템을 ‘정보의 비대칭성’을 붕괴시키는 시도로 돌파해나갔으며,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그것은 읽으면 바로 쉽게 이해되는 각 나라의 모국어 성경번역운동과 그 번역된 성경들을 빠른 시간안에 인쇄해서 보급할 수 있는 활자의 발명으로 그 혁명은 마치 들판에 불이 번져나가듯~~번져 나갔다! 결국 종교개혁은’정보의 비대칭성’을 붕괴시키는 ‘정보혁명’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역사는 오늘날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한번 재현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개신교는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가톨릭과 너무 닮아있다.


기도만하면 알아서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기득권과 권력, 재벌들과 철저하게 유착되어 있고, 이해관계에 따라 정의와 진리는 왜곡되어 있으며 , 교회와 권위에 대한 절대적 순종만을 강요하고있다. 목회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SNS라는 혁명적 소통의 도구를 무서워하고 꺼려하고 있다. 마치 교사들처럼 옳은 말만을 일방향적으로 외치는 데 익숙한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설교와 해석이 도전받고 이의를 제기하며, 토론의 대상이 되는데 적응을 하지 못하고 혐오감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금만 누가 이의를 제기하면 페북을 닫아버리고, 공손하게 이의를 제기하면 거만하게 무시하며, 교단과 교회의 비리와 부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넌 얼마나 깨끗하길래 감히 교단지도자들을 비판하느냐고 싸잡아서 욕한다.


그들의 논리대로 라면, ‘하나님’정도 수준은 되야~~이 세상의 부패와 비리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런 문제를 알았더라도 일단은 위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거니까 순종하면서 기도만하면 알아서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뜻일까?


둘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태도다!


첫번째는, 세상의 불의와 부패에 대해 분연히 일어선 성경속의 모든 선지자는 다 그들이 완벽한 인간이기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건가? 그렇지 않다!


공의와 정의의 가치는 ‘하나님의 속성’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속성이기에~~시대의 불의가 판칠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불의한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선지자’를 직접 택하시고 세우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을 질타하셨다!


두번째, 아무리 상위질서가 부패하고 타락했어도, 일단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이니 무조건 순종하고 기도만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주신다는 태도 또한 위험하기 그지없는 태도다. 그것은 신비주의나 경건주의 쪽의 흐름으로, 만일 정말 그렇다면 구약이나 신약에서 시대의 불의에 맞서 시대를 개혁한 선지자들, 왕들, 제사장들은 하나같이 주제넘게 자기가 쓸데없이 나선것인가?~~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킬 때,’사람’을 통해 변화시킨다고 그렇게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를 하면서도, 왜 세상의 불의앞에서는 다 하나같이 꾹참고 기도만하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내가 볼때 소위 경건한 목회자들이 ‘의미’하는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는 ‘전도’만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들은 ‘교인’을 한명 더 늘리는 것이야 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쯤 이르면...난 정말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여기에 내가 좋아하는 한스로크마커의 글을 인용한다.


“기독교의 주류는, 모세 오경과 성경 전체를 통해 선포된 언약사상을 무시하는, 일종의 경건주의에 빠졌다.구약 성경은 종종 무시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의미는 단지 경건 생활로 국한되었다.그리스도인들이 주로 경건주의적 활동에만 주력함에 따라 철학, 과학, 예술, 경제, 정치 등 인간 삶의 대부분의 영역들은 너무나도 쉽게 세상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예술과 기독교/ IVP]-2장 기독교의 반응-중에서


우리는 ‘세상’에 속해있다. 많은 선지자와 크리스쳔들과 성도들이 자신이 속한 ‘세상’속에서 자신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의 모든 있는 힘을 다해 ‘사명’을 이루는 고군분투의 삶을 살아왔다.(히브리서11장)


특히 예레미야는 고국이 멸망해가는 시대의 중심에서 부패한 왕,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무지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치열한 싸움을 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살아냈다.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속한 세상(시대적,공간적)에 관심이 많았고 그 세상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그 가운데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했으며, ‘긍휼과 자비’의 가치로 판단해야 할 때와 ‘공의와 진리’의 가치로 싸워야 할 때를 분별해서 ‘선한 싸움’을 싸웠다!


소위 경건한 크리스쳔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무지한 것을 자랑으로 삼는 이 시대의 잘못된 교회문화를 나는 염려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크리스쳔들을 양산하는 목사들에 대해 나는 분노한다!


아까 ‘나꼼수’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왜 사람들이 ‘나꼼수’에 열광할까? 나꼼수4인방은 자신의 이익과 권익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기득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사회가 정의로와지고, 서민들의 권익이 보호되고, 결국은 다같이 잘살아보자고 외치기 위해 위정자들의 위선과 부패와 비리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렇게 폭로할 경우에 맞닥뜨리게될 금전적, 신체적, 사회적 위험도 모두 감수하고 그들은 최전선에 나와서 싸우고 있다. 실제로 싸우다가 그들은 많은 희생을 지금도 치뤄내고 있다. 거창히 말하면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사사로운 불평에서 비롯된 비난이나 원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리어 그들이야말로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적 외침과 정말 비슷한 모습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런 그들에게 대한민국 개신교 목회자들의 상당수는 ‘나꼼수’가 세상을 비방하며 원망하는 사회문화를 퍼뜨려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우리가 불쌍히 여길자가 부패와 비리를 일삼는 대한민국 위정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인가? 아님 그들때문에 살기가 팍팍해서 자살하고, 붕괴된 교육탓에 아이들의 인격이 망가져가고, 자살하는 일반 서민들인가?


불쌍히 여기며, 분노하고, 싸우는 신앙

정말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고, 단호히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으로 싸워야 할 때 싸울 줄 아는 정말 지극히 상식적인 크리스쳔들은 대부분 평신도들이다.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은 정말 반성하고 개혁되어야 한다.


세상에 관심을 끊고 목회자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최고의 신앙인인냥 추켜세우는 문화가 이렇게 팽배해 있는 이상, 대한민국 교회의 미래는 암담하기 그지없다...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성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줄 알고, 죄로 말미암아 문제많은 이세상에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는 그런 크리스쳔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목회자들도 성경만 쳐다보고 있지말고, 세상에 대해 연구하고 깊이 살펴보며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속한 세상은 ‘우리’에게 책임을 지워주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땅의 모든 부분,

구석 구석에 임하게 해야할 책임이 있다.


예수님의 주기도문은 그런 뜻이 아니었던가?...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10.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6:9~13, 표준새번역]


크리스쳔들이여 제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가치로 판단해야 할때와,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의 가치로 판단해야 할 때를 분별하자!

그래서 ‘자비와 긍휼’의 가치로 일어서야 할 때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희생해 생명을 살려내는 감동을 보여주자! 또 ‘공의와 진리’의 가치로 싸워야 할 때는 자신이 좀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분연히 용감하게 일어나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자들을 대신해 용감히 싸우자!


이 시대는 두가지 가치가 전부 다 필요한 시대다!


나는 불쌍히 여기며, 분노하고, 싸울 것이다!



[2011년 12월  페북에 끄적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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